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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Jul 07. 2024

비극과 행복은 하나다.

<영화 컨택트> 드니빌뇌브


*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 주관성이 담긴 글입니다.


원제, arrival. 도착,


   이 영화에서 나오는 외계 생물체인 헵타포드는, 비선형적인 철자법에 따라서 언어를 사용한다. 즉, 그들의 우주선이나 신체처럼 그들의 문자에도 앞뒤 방향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데,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알고 있어서 문자도 둥근 형태를 띤다.

헵타포드와 비선형적인 그들의 언어



   여기에서 빛에 대한 의인화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의 원작에서 나오는 내용 중, 광선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페르마의 최소 시간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이 원리는 한 점에서 출발한 빛이 다른 점으로 도달할 때, 광선의 경로는 두 빛의 점 사이의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는 원리이다. 즉, 이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인데, 빛은 다른 점의 빛으로 출발하기 전에 가능한 여러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 계산하고,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즉, 빛은 시작부터 목적지에 대한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개념은 이 영화의 원제인 arrival, 도착 이라는 뜻과 맞닿아 있다.


arrival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외계인인 헵타포드와도 같이, 처음부터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들은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알고 있고, 처음과 도착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영화에서 언어학 전문가로 나오는 루이스는,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목적을 밝히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습득하는 과정 속에서 헵타포드와 같은 인식 체계를 지니게 된다. 즉,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함께 일해서 결혼하게 되는 과학자 남편과의 이별과 동시에 딸아이의 병으로 인한 사별이다. 이러한 인식 체계를 지니게 되는 개념은 ‘사피아 워프 가설’을 토대로 하는데, 이것은 사고가 언어를 만든다는 것이 아닌,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다시 말해 언어에 의해서 우리의 사고가 형성된다는 가설이다.

시제가 없고,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헵타포드의 언어

   여기에서 나오는 물리학적 개념은 다음과 같은데, 원인을 확실히 알면 우주의 모든 결과를 예측가능(고전역학)한 뉴턴 역학의 방식이 아닌, ‘작용’에 의해서 정의되는 목적론적인 방식으로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즉 이러한 원리로 헵타포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보이고,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헵타포드는 인류에게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물해주기 위하여 지구에 도착하였고,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피아 워프 가설’과도 같이 인류가 모든 시제를 동시적으로 취할 수 있는 양식으로 발전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루이스는 훗날 자신의 남편이 되는 이안에게 다음과도 같은 질문을 한다.


“이안, 당신의 생애를 전부 볼 수 있다면 다르게 행동하겠어요?”


   루이스는 자신의 미래, 즉 이안과 결혼한 뒤 한나를 낳아서 이안과 한나를 동시에 떠나보내야만 하는 자신의 목적지, 즉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래를 알고도 그 결정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이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과를 알고 그에 따라서 항복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것은 삶이라는 것에 굴복하여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뜻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양자역학의 중첩이라는 내용에 비유할 수 있으며, 책의 내용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는 답변이 있다.

   ‘양자 중첩’이란, 하나의 광자가 ‘두 경로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광자를 보면, 즉 관찰하게 되면 도약하여 한쪽 경로만 존재하고 간섭이 사라지게 된다.

   이는 루이스의 삶에 어느 정도(완벽하진 않지만) 적용시킬 수 있는데, 자신의 경로, 즉 미래를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관찰했음에도 그 경로 자체를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양식이다. 여기에서 추가적으로 책의 내용을 보완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움직임에 특별히 강요받은 듯한 느낌은 없지. 오히려 네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불을 잡으려고 달려갈 때 같은 절박한 느낌에 가까워. 본능적으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하는 느낌.”


- 네 인생의 이야기 중


   여기에서는 양자 결맞음이라는 개념을 또한 비유로 들 수 있는데, 양자 결맞음은 양자들이 파동처럼 결이 맞는 현상이다. 측정되기 전의 양자 비결정성 ‘indeterminacy'이라는 상태, 즉 측정되기 바로 그 순간이 되기 전까지 양자를 알 수 없다가 측정이 시작되고 난 뒤에 양자들이 결맞음 상태가 되면 양자들은 주변의 분자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행동이 가능하게 된다. 즉, 물체들이 각각의 위상이 같을 때, 이를 결 맞는다고 하는데, 큐비트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일제히 같은 모드로 진동하도록 배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상태는 어떠한 흐름, 연결성과 같은 양상을 지니는 것이다.

   여기에서 루이스는 자신의 목적, 즉 미래를 관찰하고, 그 목적에 맞추어 모든 순간들을 맞이하며, 양자 결맞음과도 같이 우주의 춤에 동참하여, 행동하고 그 미래로 다가감으로써 모든 순간을 자유의지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심오한 질문을 우리들 개인의 삶에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인가? 우리의 운명은 정해진 것인가?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의미’라는 것은 다음과도 같다.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 상태를 알아야 한다.”

   즉, 우리는 어떠한 결을 지닌다. 사람마다 그 결의 크기와 의미, 그리고 모양은 다 다르지만, 그것은 거미줄이 연결되어 있듯 개인이 독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춤처럼 한꺼번에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성에서 가능한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자신의 아주 사소한 행동 혹은 사고를 통하여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우연 같아 보이는 어떠한 행위나 사건에도 자신의 ‘현재 위치’에 따라서 그것이 결정되며, 그 운명 같아 보이는 것들은 어떠한 점들이 시간적으로 켜켜이 모여 양자 결맞음과 같이도 어떠한 연결성을 나타내는 양상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우주의 춤이다. 작위적이라는 단어를 이와 상응되는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우주의 표현을 망각하고, 획일화되거나 무의식에 따라서 이 흐름을 거슬러서 억지로 노력하면서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한 행동이 모든 것을 증명해 줄 순 없다.

   우리는 루이스처럼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과 비극을 동시에 겪는다. 루이스는 남편의 만남과 딸아이의 탄생이라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을 얻는다. 동시에 이별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얻는다. 여기에서 루이스의 삶은 과연 비극인가?

   그녀는 ‘흔쾌히’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고 받아들였고, 그 받아들임의 의미라는 것은 행복 뿐 아니라 불행 또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즉 삶이라는 이중적인 모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미래에 있을 어떠한 상황에 의지하지 않고 그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걸 뜻한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해서 받아들인 자신의 미래,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의도 없이 모든 순간을 고스란히 사랑하고 겪어내는 것. 그것이 비단 루이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부여받은 게임이자 과제 아닐까?

   우리의 삶은 행복과 비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중적인 특질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러한 거시적인 관점 속 미시적인 해석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비극처럼 보이는 한 사건조차 한 개인의 성장을 위한 삶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영화 <타르>의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끝마친다.


“décidant quand commencer on quand reprendre, ou de ne plus me soucier du temps. En réalité, dès la première seconde, je sais exactement où on en est et le moment exact où vous et moi arriverons à destination ensemble."

"완벽한 순간을 찾아 다시 시작할지 재정비할지 아니면 시간을 다 날릴지 결정한다는 거죠. 현실은 이래요. 연주가 시작된 순간부터 전 정확히 압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여러분과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Parce que le temps est venu, mes amis, de diriger de la musique qui exige une impliction de botre part.

De la musique que le public connaît, mais qu'il entendra d'une autre oreille. quand vous l'interpréterez pour lui.

Après tout, "une âme choisit sa compagnie."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의 뭔가를 담아서 음악을 지휘할 때니까. 모두 아는 음악이지만 매번 다르게 들릴거야. 여러분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영혼이 자신이 있을 곳을 선택한다.’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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