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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Jul 28. 2024

치유와 하루, 박하리

근력운동을 한 이후부터, 여지껏 내가 잘못된 습관, 혹은 예민한 몸, 혹은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종종 몸이

다치거나 틀어지면 병원에 간다. 이제는 병원에 가는 게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무언갈 고쳐야 한다는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는데(심각한 건 아니고 나는 내 몸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관리차 가기도 한다),


   몸을 한 번 고쳐야겠다고 결심한 이후에 내가 얼마나 잘못된 습관을 지녔는지, 나의 몸이 얼마나 예민한지를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맹목적으로 병원에 가진 않는데, 이제

하도 많이 가다보니까 어디가 약간 다치면 어느정도 휴식을 취하면 낫겠다 라는 감조차 생겼다. 예전에 운동선수였던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항상 했던 말이었는데 이제 나도 알겠다.


   요즘에는 발때문에 약간 고생중인데, 그곳을 내가 스스로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있다. 나에게 가진 애로사항이 무엇이길래 어떠한 이유로 몸이 아픈지에 대해 말이다. 사람들이 종종 잊는 건, 몸이 아프고 난 뒤의 치료나 통증관리를 주로 하지만,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 습관을 고치는 건 다름아닌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 습관을 고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 더이상 그 병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 물론 통증관리도 병원에서 하는 건 참 중요한 일이다.


   내 몸과 식습관에 대해서 ‘참을 수도 있는 것’ 에 대해 배우고 있다. 운동중독이었던 나는 오히려 운동을 안 하는 게 더 괴로웠는데, 운동을 참을 수도 있는 것,

배고프게 먹을 줄도 아는 것을 실천중이다.


   무엇이든 꽉꽉 채우려고 하는 것 또한 결핍의 일부이다.


   그래서 어제는 누워서 명상을 하며 발의 언어와 위의 언어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계속해서 마주하려던 결핍들과 마주했고, 그 결핍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그 끝쪽에 도달했을 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난 엄마가 너무나 싫은데, 동시에 엄마가 그리웠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충실하고, 굳건하고, 커리어 우먼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고, 자기 자식에게 온화하며, 함께 지식을 나눌 수 있고, 명석하고, 힘이 있으며, 지혜로우며 동시에 따뜻하며 동시에 냉철하고 단호하며, 주관이 뚜렷하며 사람들과 조화로울 수 있고, 경제적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엄마를 원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모든 측면에서 다 반대였다. 나에게 의존하며, 행동을 하지 않고 걱정을 하며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하면서 사는 우리 엄마,


   그런데 나는 그런 엄마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언제나 고아같이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이 자라서 그런 것 같다. 항상 가족에게 기대고 싶을 때마다 엄마는 어깨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는 곰곰이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숙고해 보았는데, 40대의 우리 엄마와 50대의 우리 엄마가 있었다. 40대 초반의 엄마는 본인만이 중요해서 항상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나에게 어깨를 내어주지 않았는데,


   50대의 엄마는 나를 5살인 것 처럼 아이처럼 다루어주었다. 사실 그 때의 엄마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투정을 부려도 다 괜찮다고 했는데, 어렸을 때 이런 대접을 받아보지 못해서 정말 낯설면서도 진짜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난 그 엄마가 그립기도 한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해 보이면서도 완벽을 향해 도달하는 존재같기도 하다. 무언가 단점이 있기에 그것을 보완해가면 또다른 단점이 보인다. 하지만 그 단점으로 인해서 사람은 더욱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다. 나도 언젠간 내가 싫어하는 우리 엄마를 용서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싶은데, 그 날이 두려우면서도 억지로 노력할 필요조차 없겠다 싶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가 못난 모습이나 실수했던 모습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사고는 아니지만

   실은 모든 사람들 또한 자신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스스로의 악을 두려워하기에 타인의 악을 조롱하고 비난한다.


   그러므로 본인이 해야할 일은 다름아닌 자신에 대한 이해와 용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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