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34기, 글감 : 내가 원하는 창조 신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고, 한 여자가 날이 유달리 예쁘다고 생각하며 남자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지난 10달 동안 아이를 뱃속에 데리고 다녔다. 그녀와 아이는 모든 것을 공유했고 뭐든지 함께 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맛있는 것도, 맛없는 것도. 그러나 이제는 아이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여자는 직감했고 아침부터 부랴부랴 짐을 싸서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이는 뱃속에서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그리고는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여자와 남자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영영 혼자가 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울음이 차올랐다.
‘물러야겠어.’ 아이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뱃속으로 들어오기 전의 세상을 떠올리며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는 자신과 10달 동안 지냈던 여자의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지난 10달간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한 번 꽁하고 박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이는 삼신할매가 다스리는 꽃밭에 주춤주춤 들어섰다. 눈을 감고 아이를 기다리던 삼신할매가 말했다.
“돌아왔구나.”
아이는 삼신할매의 말을 이해했다. 걱정과 깊은 안타까움. 할매가 자신에게 몇 년의 생을 허락했는지 모르지만 돌아온 아이가 다시 세상에 나갈 때 우주의 흐름을 뒤튼 책임을 져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뭔지 할매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밖에 눈이 와서요. 저는 추운 게 싫거든요.”
하고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할매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아직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할매가 점지한 일을 물리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보다 더 큰 두려움과 공허감이 아이를 잡아먹은 듯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었고, 아이가 할매의 꽃밭에 들어섰을 때 여자는 10달을 가득 채운 차가운 몸을 낳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꽃밭을 거니는 삼신할매의 눈에는 깊은 수심이 가득했다. 10달을 다 채우고도 다시 돌아온 영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젠가 들었던 카르마가 자신에게 더 많이 쌓였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는 삼신할매의 손을 잡고 안전함을 느꼈다.
이후로 삼신할매는 부지런히 영혼을 점지했고 아이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할매에게 세상은 두렵고 외로운 곳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할매는 그렇다고 말했고 아이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실망스러운 아이의 표정을 가만 내려다보던 삼신 할매는 말했다.
“눈이 오면 말이다, 눈을 피하지 말고 눈과 함께 춤을 추면 된단다.”
아이는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꽤나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두렵고 외로울 때에도 춤을 출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할매는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내가 하나만 말해주마. 너는 언제든 안전하단다.”
할매의 말을 듣고 아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꽃밭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과 함께 했던 여자는 이미 한 명의 사내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할매는 하나의 영혼을 여자에게 더 점지하려던 참이었다. 아이는 할매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제는 외로운 세상에도 춤을 출 수 있는지 확인하러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삼신 할매는 슬프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를 마지막으로 안아주었다. 세상에 내려가면 모든 걸 잊겠지만, 앞으로의 생에 고통이 가득할 거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래도 할매가 점지한 날까지 살다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꽃밭을 떠났다. 세상이 가까워지자 아이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생의 무게가 점차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꼭 감았다.
아이는 하얀 눈이 내리던 날 첫 째 아이를 잃은 여자의 세 번째 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날이 유난히 예쁘던 날에. 그리고 자신이 뉘어진 바닥의 보들보들한 요를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흐릿한 꽃밭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기억은 사라지고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