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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an 19. 2023

환상 로맨스

“야 틴더에서 자기소개가 길면 바로 제껴버려. 자기소개가 길다는 건 자아가 있다는 소리니까. 남자는 자아가 있으면 안돼.”

자아가 없는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만나지 생각하다가, 림이 문득 S 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런가…’

“여자한테 로맨스는 필요없어.” 림이 술에 취한 목소리로 크게 푸하하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밤, 림이 언젠가 보내줬던 시를 다시 읽는다.

고기는 고기이기 전에 귀엽고 고기인 다음에는 맛있다 여자는 여자이기 전에 귀엽고 여자인 다음에는 맛있다
이상하지 않니?
…(중략)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왜 멜로드라마는 계급투쟁으로 읽히지 않는가
- 성다영,'투명한 얼굴'


내가 울며불며 떠나왔던 과거의 로맨스를 떠올린다. 아니면 애초에 그건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었나. 모든 연애는 제각기 폐허 같았다.

“나만큼 너를 사랑해주는 남자는 없을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지.’

“나는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을게.” 순진한 척 속아 넘어갔다.

“네가 너무 불안해 하니까 말을 안 한거야. 네가 그렇게 반응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해?” 그렇지. 그렇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너만 안 우울하면 우리 관계는 아무 문제없어.”

“우울증은 언제쯤 나아?”

나도 몰라 시발.

나는 끝내 그들을 하나씩 떠나왔다. 로맨스는 환상일 뿐인가, 오랫동안 고민한다.

로맨스가 환상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여전히 돌아가고 싶은데… 전남친의 마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데. 내가 떠나왔다기 보다는 떠밀려 오게 되었는데. 완전히 떠나지 않은 마음을 붙잡고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환상인가.



그는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한 다음 자리를 떴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그가 그녀를 혼자 자게 내버려 두는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었다. 아파트는 텅 비어 있었다. (…)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속에서, 오랜 병이라도 앓은 것처럼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J는 회사에 다녔고 나는 대학교 막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주중에 시간을 내 J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그를 찾아갔고 우리는 그가 묵는 하숙집의 작은 방, 얇은 싱글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을 잤다. 한 겨울 너무 추운 그의 방은 작았고 창문은 컸지만 환기를 잘 하지 않아 먼지가 돌돌 굴러다녔다. 그곳에서 J는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10시 반이 되면 잠에 들었다. 나는 오랜 불면증을 앓고 있어서 코를 고는 J를 옆에 두고 어두운 방 안에서 휴대폰 화면 불빛에 의지해 동이 틀때까지 책을 읽었다. 그리고 종종 울었다. 같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는 걸, 오히려 같이 있기 때문에 더 외롭다는 걸 깨달았다. 누덕누덕 기워진 고독의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T와 나는 당시 한국-스웨덴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학기 중에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 방학에 스웨덴에서 T와 함께 한 달 가량을 지내곤 했다. 두 번째로 스웨덴을 가게 된 겨울, 13시간의 비행 그리고 2시간의 대기 다시 2시간의 비행 끝에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두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곧 T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리고 나는 T가 적어도 무사히 잘 도착했는지, 언제쯤 오는지 등의 메세지를 남겼을 거라고 생각하고 비행기 모드를 풀었는데 휴대폰은 고요했다. 내가 그에게 전화하자 그는 기차역에 마중을 나가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의 집은 기차역과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두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아서 오히려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H는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너무 많은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 집착하는 여자로 보여지게 될까봐 두려웠고 그래서 8시간이고, 10시간이고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그저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는 게임을 했다거나, 잤다거나 친구와 놀았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동안 손이 떨려서 펜도 잡을 수 없고 마우스도 쥘 수도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사실을 H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억지로 수면제를 먹고 자고 일어난 뒤에도 연락이 없는 휴대폰을 맞이하거나, 뜬 눈으로 10시간을 내내 불안 속에서 기다렸을 뿐이었다.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반-나르시시즘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반-나르시시즘이란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자기자신을 사랑받도록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이다! 남자들은 반사랑이라는 치욕스런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사랑받는 여성이라는 환상은 너무나도 공고해서 그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거기서 헤어나가기 힘들다. 나는 여전히 내가 떠나온 남자들이 가끔 그립고, 내가 만나게 될 남자들이 궁금하다.

하지만 이제 좀 더 다양한 가능성 앞에 서 있고 싶다.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고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사회에서 주입했던 단 하나의 행복의 시나리오를 찢어버리고 얻게 될 가능성 앞에서 나는 좀 더 아름다운 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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