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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종구 Dec 18. 2024

다시 한 번 내게 삶이 허락된다면

  오늘, 화장터에 다녀왔다. 고인이 담긴 관의 귀퉁이를 잡아 올리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난 고인이 된 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인을 알지 못한다 해서, 화장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관을 붙잡고 눈시울을 붉히는 유가족들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한 때 살을 맞대어 온기를 나누었던 이가 차갑게 식어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사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고인이 든 나무관을 보내고, 갈비탕을 받았다. 우동그릇을 가로지르는 길다란 갈빗대 아래로 뽀얀 국물을 보자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식욕을 참기 어려웠다. 뜨거운 국물을 삼키면서 뜨거운 불아래 까맣게 타고 있을 고인의 몸뚱이를 잠시 떠올렸다. 죽음을 보고도 살겠다고 입 속으로 음식을 쑤셔넣고야 마는 이 식욕이 참 서럽다고 느꼈다.



  젊어서는 돌고도는 윤회의 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후에는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오랫동안 인정했었다. 지금은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손으로도, 관념으로도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단정짓지 않고 모르겠다 인정하며 지내는 것도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상상 자체가 여전히 어색하다.



  “제 소원은 늙어죽는 것입니다. 맞아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고, 제 명대로 살다 늙어서 죽고 싶어요”


  얼마 전, 우연히 마주친 이 문장이 머릿 속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지금 내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들이 호흡을 하듯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 환경의 유익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 문장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주는 듯 하여 한편으로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숨죽여 살고, 먹을 것을 제 때 구하지 못해 때이른 죽음의 강을 건너는 이들의 존재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잊고 지내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얼마전, 조카가 놀러와 그림 한 장을 그리고 갔다. 그가 두고간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치마와 구두, 밝게 웃는 구름들과 하늘을 떠다니는 음표들… 눈으로 보이는 것과 손을 통해 그려지는 것들의 온도차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헤아려보다 그만두었다. 


  그러다 문득, 내게도 또 하나의 삶이 허락된다면, 어린 아이가 되어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의 사랑을 양껏 끌어안고, 부모가 마련해준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그런 삶…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그런 삶. 다만 현생에선 그럴 순 없으니, 지금 내 품에 있는 이 아이들에게 내가 꿈꾸었던 아비의 모습으로 살아보겠노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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