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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Jun 12. 2020

육아는 뺄셈 그리고 기하급수다.

동생이 생기는 건 남편이 바람피운 여자를 들여앉히는 것과 같다더라...

아이들이 아팠다.


작은 아이가 5~6일 정도 감기 증상이 있었다. 심한 건 아니었는데 감기 초반에는 열이 올라 좀 걱정이 되었지만 해열제를 먹이니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지금은 열이 나는 것보다는 입맛이 떨어지고 기운이 없어한다. 일주일 한번 학교에 가는데 아프면 갈 수 없다고 하니까 본인이 알아서 컨디션 조절을 하는 것 같다. 평상시 같으면 나가서 놀자 놀자 따라다니면서 얘기했을 텐데 조용히 집안에서만 놀거리를 챙겨서 펼친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는 몸 컨디션을 보호해줄 필요가 있었다.     


작은 아이는 그냥저냥 컨디션만 잘 조절하면 될 것 같은데 큰 아이도 몸 상태가 별로다. 감기가 잘 걸리지 않은 아이인데 엊그제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아프다고 했다. 급하게 작은 아이가 다니는 소아청소년 의원에 데리고 가서 약을 처방받았는데 약이 전혀 효과를 못 본 것 같다. 목뿐만 아니라 코까지 꽉 막혀서 숨조차 쉬기 힘들어했다. 잘 아프지 않은 아이가 아프면 크게 힘들어해서 우선 큰 아이를 챙겨야 했다. 일요일이라 집에서 조금 먼 병원을 다녀와야 한다. 상태가 좋지 못한 작은 아이까지 데리고 가기가 껄끄러워 아침 이른 시간이지만 시어머니께 부탁을 드리러 전화를 드렸다. 흔쾌히 작은 아이를 맡아 주시겠다고 하셔서 한시름 놓았다.      


일요일 아침이지만 병원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여러 가지 묻는 것이 많았다. 감기가 심하다고 하시며 증상에 대한 약을 처방받았다. 식사를 하고 먹어야 한다고 해서 먹고 싶은 것 있냐고 물으니 떡볶이란다. 큰 아인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떡볶이 특히 매운 떡볶이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작은 아이와 함께 나오면 매운 걸 잘 못 먹고 너무 느리게 먹기 때문에 가는 장소와 메뉴가 정해지게 된다.

우선 메뉴 선택에 제한이 많은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정해진다. 다음에는 언니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선택하는 거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거의 매번 작은 아이 위주가 되는 것 같다.     


연년생이나 나이 터울이 작은 집은 작은대로 고충이 있을 것이다. 식사할 때도 그렇고 외출할 때나 특히 아이가 아플 때, 아침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를 보낼 때도 전쟁 같은 일상일 것이다. 상상이 되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동생이 생기는 건 남편이 바람난 여자를 집에 들여 앉히는 것과 맞먹는 스트레스란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터울이 있으니 키우기는 수훨했겠다라는 말씀을 건네신다. 작은 아이가 2~3살 어릴 때는 그런듯 아닌듯 했지만 나이터울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고충이 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아이는 그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고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니 모든 것을 큰 아이가 원하는 대로 맞출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맞춰져 있었고 그 생활에 너무 익숙한 아이였다. 엄마는 늘 자기 위주로 모든 걸 맞춰주었는데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아기 위주로 상황이 역전되었으니 동생가 미웠을 것이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까지만 해도 작은 아이는 귀여운 아가였다. 초등학교 때 한창 블록놀이나 그림, 만들기를 하면 작은아이는 여지없이 무너뜨리거나 낙서나 찢는 것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내가 부엌일을 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말이다. 작은 아이가 뜨거운 사골국을 손으로 툭 쳐서 큰아이 허벅지에 쏟은 적도 있다. 작은 아이에게 까꿍 놀이를 해주다가 작은 아이가 손톱으로 큰아이 각막을 긁어낸 적도 있고 말이다. 찢어진 그림 숙제를 테이프로 붙여서 내야 했고 색연필로 여기저기 엉망이 된 일기장을 선생님께 제출해야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다. 동생이 생긴다는 건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겨서 그 여자를 집에 들어 앉히는 것과 맞먹는 스트레스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나만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랑을 어린 동생에게 빼앗기고 동생이 잘못했음에도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동생편만 들어주는 엄마가 참으로 야속했을 것 같다.



 나이 터울 있는 동생은 사고뭉치. 그래서 힘들다


큰 아이가 고학년으로 될수록 둘의 단합과 융화는 더욱 어려워졌다. 어릴 때는 인형 같던 동생이었는데 이젠 작지도 귀엽지도 않다. 사사건건 시비다. 한 대 쥐어박으려면 눈물바다를 만들어 엄마의 시선을 끄는 동생이 참으로 얄미웠을 것이다. 언니가 없을 때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가 언니 서랍을 헤집어 놓기도 해서 큰아이의 입이 한나절은 나와있다. 나에게 편을 들어달라는 SOS를 보낸다. 우선 큰아이의 손을 들어줬다. 보통은 언니 편을 들어주지만 적절히 해야 하는 판단력도 있어야 한다. 계속 큰 아이 편만 들어주었다가는 엄마의 후광을 믿고 동생을 깔보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미운 8살 딸내미도 15살 사춘기 딸도 만만치 않다. 만약 나이터울이 더 있었다면 좀 덜 싸우려나?


이렇게 싸우고 난 후에도 가끔 작은 아이가 큰 아이의 시중을 기꺼이 들어주는 때도 있다. 좋아하는 액세서리였는데 언니가 흔쾌히 주겠다거나 본인의 숙제인데 언니가 정성 들여 도와줄 때는 아주 이상적인 자매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주 어쩌다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따로따로 데이트를 즐길 여유가 생겼다.


요즘은 큰아이가 공부하러 나가니 작은 아이와 부딪히는 횟수는 많이 줄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엄연히 다른 문화라서 같이 뭘 하긴 힘들고 앞으로 더 그럴 것이다.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면 큰 아이는 21살 어른이다.     


아이들이 어릴 땐 어려운 일이었지만 요즘은 따로 한 녀석씩 데리고 데이트하는 여유가 생겼다. 오늘처럼 어머니께 작은 아이를 부탁드리고 큰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한다. 우선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았다. 나와서 예쁜 옷을 골라주기도 하고 서점에 들러서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골라보기도 한다. 순전히 아이 취향에 맞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말이다.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동생이 없을 때의 외동딸처럼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충분히 외동딸인양 아이의 시선을 받아주는 동안 본인 이야기, 친구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흡족히 엄마와 시간을 보내면 집에 가서 동생이 좀 불편하게 하더라도 관대 해지는 언니가 되기도 한다. 커지니까 한 아이씩 단독으로 보내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



  육아는 전방위적인 삶의 수업이다


육아는 전방위적인 삶의 수업이다. 어떤 공부를 해도 육아처럼 다양한 공부를 해야 되는 분야는 없는 것 같다. 예전의 나의 부모처럼 낳은 대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모공부, 엄마 공부가 필요하다.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 배울 수도 있지만  아이들과 부딪힌 경험들이 내 삶의 기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힘들이 모여서 좀 더 단단해 지는 것 같았다.  


육아란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닌 자발적인 동시에 강제적인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밖에서 노동으로 분류되는 일들은 통제가 가능한 일들이다. 일을 조율할 수도 있고 내가 하기 싫다거나 능력밖의 일들이라면 분담할 수도 있고 극단으로 간다면 그만두고 나올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육아는 그러기가 힘들다. 하기 싫어도 능력이 되지 않더라도 배워서라도 치뤄야한다. 하기 싫다고 그만 둘 수가 없다. 일 때문에 누구에게 맡겨 키운다 할지라도 마음의 무게까지 맡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 내 삶속에 이렇게 무게가 지워진 일이 또 있을까? 어떤 다른 일을 하더라도 부모라면 병행해야 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난 엄마고 아빠이기 때문이다.



백치 엄마가 되기로 했다


노자는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라고 말했다. 부드러우면 꺾을 수 없고 반면에 억세면 부러진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생명의 성질이고, 강하고 단단한 거은 죽음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약하고 부드러워도 물은 부러지지 않으나 막대기나 쇠는 강하고 단단해도 저보다 강한 힘을 받으면 부러진다.      
                                                                                                  - 마흔의 서재-


엄마라서 내 자식이 더 잘 되길 바랬다.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싶었고 더 똑똑해지길 바랬다. 욕심이 더해질수록 알게 모르게 탈이 났었고 아이나 나나 트라우마가 생겨났다.

오히려 똑똑한 엄마나 하나라도 더 보태어주는 엄마보다 백치엄마가 되니 아이들은 마른땅이 숨을쉬는 땅처럼 되살아났다. 내가 기다리는 법을 배우니 아이들 스스로 꽃이되고 나무가 되길 자처했다.


책과 세상에서 배우는 육아는 덧셈뿐이었다. 많이 넣어줘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힘을 빼는 육아에서 답을 얻어가고 있다. 뺄셈에서 기하급수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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