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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Jun 15. 2020

내 동생 택배 보냈으면 좋겠어요

“엄마, 엄마. 솔이 좀 봐봐. 내 블록으로 자꾸 기어 와요.”

“엄마 이 그릇만 마저 닦고 솔이한테 갈 거니까 잠깐만 기다려.”

“솔이야 저리 가. 내가 만든 블록 쓰러진단 말이야.”

“엄마, 솔이가 내 말을 안 들어. 자꾸 온단 말이야.”     



두 아이들을 거실에 놓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려고 하는 잠깐의 순간도 매일 아찔하기만 하다. 작은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니는 순간부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다. 어릴 때부터 거실에서 블록이나 보드게임을 많이 했던 큰 아이는 블록을 세우기도 전에 작은 아이의 움직임 심상치 않다는 걸 안다.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작은 아이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온다. 한 대 때리고 싶지만 눈이 뒤에도 달린 엄마가 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보고 있지 않더라도 분명 울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그냥 엄마에게 SOS를 청하고 엄마가 올 때까지 손으로 솔이를 제지해 보는 것이 더 낫겠다.     



난 첫째였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는데 아들 사랑이 지극하신 부모님은 동생의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눈썹이 진하고 외까풀이지만 눈이 제법 큰 동생 외모에 대한 칭찬은 늘 끝이 없었다. 온 동네가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음에도 입이 짧아 편식이 많았음에도 나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음에도 부모님의 사랑은 늘 동생 차지였다. 그 당시 동생을 이기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 엄마, 몰라 몰라. 솔이가 내 블록 무너뜨렸어요. 으앙. 솔이 너 이럴 거야? 언니가 오지 말라고 했지?”

“솔이는 어리잖아. 블록은 다시 만들면 되고. 엄마가 다시 만드는 거 도와줄게.”

“싫어요. 내가 만들었던 블록이 훨씬 좋아요. 솔이 너 미워.”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작은 아이는 1살이었다. 그때는 1살짜리 아기이니 네가 참아라, 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블록이 신기했던 것뿐이라고 큰 아이를 설득했다.     


“솔이 너 언니 블록 부수면 어떻게 해. 언니가 울잖아.”


그냥 부수고 입으로만 가져가려는 아기를 대변해 큰 아이를 달래 본다.


“바다야, 솔이가 미안하대. 솔이는 언니랑 놀고 싶은가 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작은 아이를 대신해서 큰 아이에게 작은 아이는 이런 마음일 거다라고 전하지만 마음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있는 상태이다.     


갑자기 큰 아이가 테이블에서 무언가에 열중했다. 그리고 솔이에게 다가갔다.


“바다야, 솔이 이마에 뭘 부친 거야?”
 “우표요. 솔이 너무 말썽꾸러기야. 다른 집으로 택배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큰 아이도 어리고 작은 아이도 어려서 큰 아이가 내뱉는 불만에 대해 중재하느라 바쁘기만 했다. 이런 행동은 엄마인 내 앞에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큰 아이 입장에서는 속이 타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제 작은 아이는 초등 1학년이고 큰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어릴 때의 그런 소소한 싸움은 늘 일어나지만 난 여전히 작은 아이가 1 살배기 아기로만 보인다. 8살이나 되었음에도 아기니까 그럴 수 있다고 큰 아이를 설득할 때가 많다. 막내고 집안의 사촌 아이들과도  나이 터울이 크다 보니 자꾸 대변인처럼 작은 아이를 감싸게 된다. 큰 아이는 엄마가 아니라 언니임에도 자꾸 엄마의 마음을 강요하는 내가 비친다.     


나 또한 엄마가 늘 동생만 감싸는 것이 너무나 싫었음에도 내 행동 또한 그렇게 표현된다. 큰 아이가 작은아이에게 자꾸 양보하기를 권하고 그렇지 않으면 괜한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잘 몰랐는데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다 보니 나 또한 어릴 적 엄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당시 참 상처도 많이 받았고 동생이 너무나 싫었었는데 말이다. 동생을 어디라도 멀리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 아이의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감정을 쫒아 내리사랑만 쏟는 것 같다.               


또한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어릴 때 느꼈던 감정과 동시에 엄마의 감정도 느껴본다. 첫째와 둘째의 대한 사랑의 경중은 없지만 표현이 둘째에 대해 더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이 아들을 더 귀히 여김 때문이 아니라 모든 부모가 내리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음 아이들을 키우면서 깨닫는다. 아이들로 인해 두 가지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어릴 때 나와 지금의 바다, 어릴 때의 부모님과 지금의 내가 교차되어 서로를 이해해보는 경험이 된다.


하지만 부모가 느끼는 내리사랑이 편애라는 감정으로 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아이가  만약 운 좋게 부모가 된다면 이런 감정들을 느껴보리라. 그리고 내리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을 느껴볼날도 오겠지 하고 말이다. 


 

솔이 백일 날 할아버지와 함께한 모습니다.

"어머니, 아들이랑 손주랑 누가 더 이뻐요?"

"이쁜 건 당연히 손주지. 말해 뭣하냐."

"진짜 손주가 더 이뻐요?"

"얘가 얘가... 나중에 너도 봐봐라. 누가 더 이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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