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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 Jun 22. 2020

숫자의 신세계.. 화투로 시작되었다.

작은 아이가 2살쯤에 우리 가족은 시댁에 들어오게 되었다. 시댁에 들어오니 많은 것들을 아이들하고만 공유하기가 힘들었다. 시할머니도 계셨고 장사를 하셨던 시부모님도 계셨다. 시부모님은 평일엔 장사를 하시고 주말 토요일 오전에 들어오셔서 일요일 오후엔 다시 나가셨다.

    

우리는 시할머니를 노할머니라고 칭했다. 노할머니는 증손주들이 여럿임에도 마음을 터놓고 예뻐하지 못하셨다. 어머니와 시할머니는 참으로 이상하게 꼬인 고부관계이긴 한데 남편이나 내가 어머니보다 시할머니께 좀 더 잘해드리는 것 같으면 어머니는 화를 내셨다. 어머니가 할머니를 오래 모시고 살았고 꼬인 고부관계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시어머니 몰래 시할머니께 용돈을 드렸다가 시어머니께 많이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손주 며느리들이 할머니 볼 적마다 조금씩 용돈을 드리면 어머니는 그 돈을 다 쓰고 떨어질 때까지 할머니 용돈을 전혀 주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몰래몰래 드리곤 했는데 어머니께 들켜버린 것이다. 못 본 척 눈감아 주실 수도 있을 텐데 야단을 맞았다. 용돈도 그렇고 우리들이나 손주들이 어머니보다 시할머니를 더 챙기는 것 같으면 어머니식의 방책이 나왔던 것 같다. 어머니 본인은 안중에도 없는 거냐며 죄책감의 들도록 말씀하셨다. 시아버님이나 두 아드님 모두가 어머니를 제일 많이 위하는데 며느리까지 그 대열에 껴야한다는 심사처럼 들렸다. 어머니가 괜히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모든 서사를 다 알 수는 없었다. 안다고 한들 난 일개 며느리일 뿐이었다. 그냥 복잡한 감정을 짐작하는 것 뿐이다.


시댁에 살게 되니 할머니와 하는 의사소통이 좀 편하게 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하도 역정을 내시니 안부전화로만 얘기했는데 평일날은 어머니께서 안 계시니 마음이 좀 편했다. 할머니나 나나 약자인 처지라 잘 통해서 그런가? 시어머니보다는 시할머니가 좋았다. 친정에서도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주는 푸근함 들은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할머니는 손주 며느리인 나에게도 증손주들에게도 편히 해주셨다. 같이 한집에서 살다 보니 할머니는 시어른이 아니라 그냥 우리 할머니 같았다. 어머니는 주말만 들어오시기 때문에 당시 초등학생이고 두어 살배기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노 할머니의 적절한 놀이 상대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오시는 주말을 제외하면 작은 아이는 늘 노할머니와 많이 놀았다. 장에 간다거나 볼일이 있는 경우에도 할머니는 작은 아이를 잘 봐주셨다. 작은 아이가 4살 정도까지는 노할머니가 작은 아이의 가장 큰 친구가 되었다. 할머니는 예전에 불렀던 구전 동요도 알려주시고 형제들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그 당시 나이가 여든이 넘었지만 아이가 보챌 때는 업어도 주시고 외출하고 돌아오시면 풀빵을 사오 시기도 했다. 지금도 겨울에 가끔 보이는 풀빵 장사를 보면 노 할머니 생각이 난다. 큰 아이도 노할머니가 풀빵 많이 사주셨던 얘기를 하곤 한다. 큰 살림을 혼자 해야 하는 것이 많아 큰 아이처럼 딱 붙어 앉아 잘 해주진 못했지만 노할머니께서 그런 공백을 많이 매워주셨다.      


작은 아이가 4살 무렵엔 매일 종이에다 노할머니 이름을 적고 읽어주셨다. 보통 엄마가 아이 글씨를 알려주면 아이 이름부터 알려줄 텐데.. 할머니는 본인 이름만 계속 써 주셨다. 그것도 매일 하니까 어느 날엔 아이도 할머니처럼 쓰고 싶어 했다. 글자를 하나도 모르는 아이는 노할머니 이름을 삐뚤빼뚤 쓰기 시작했고 다 잘 쓰게 된 다음엔 아이 이름, 엄마, 아빠 이름, 언니 이름을 차례로 알려주시고 써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글자를 알기도 전에 글자 쓰기부터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에겐 그냥 놀이였던 것 같다. 같이 할 수 있는 놀이로 인식하지 않았으면 글씨를 다 배우지 못했을 것 같다. 할머니 방식으로 규칙을 알아가는 놀이 정도로 말이다.



어느 날은 작은 아이가 많이 울었다. 조금 달래주면 괜찮아질 것 같았는데 노할머니는 좌불안석이셨다. 너무 울어서 아기가 힘들까 걱정하시는 것 같았다. 괜찮아진다고 말씀드려도 어떡하냐고 하시며 방에서 뭔가를 꺼내셨다.     


할머니가 꺼내신 건 화투였다. 알록달록 그림카드 같은 화투는 우는 아이의 눈물도 쏙 들어가게 할 만큼 강렬했다. 아이는 화투를 그림카드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노 할머니는 이불을 깔고 아이를 앉혔다. 그림 패턴으로 짝 맞추는 법을 알려주고 점수 계산법도 알려주었다. 처음엔 어머나 했지만 예쁜 그림카드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게 생각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늘 잘한다고 칭찬해주시는 할머니 덕분에 수를 좋아하고 패턴을 좋아하게 되었다. 큰 아이가 쓰던 교구들은 많았지만 시댁 들어올 때 친정에 짐을 맡겨놓기도 했고 큰 짐들이라 생각해 한쪽에 쌓아놓아서 감히 꺼내 쓸 엄두도 못 냈었다. 작은 아이는 할머니 이름 쓰기로 글자를 익히고 화투로 숫자를 익혔다. 할머니는 방에 걸려있던 숫자가 큰 달력을 오려서 숫자카드도 만들어 주셨다. 식구들이 많아서 신발정리를 하면서 같은 패턴을 익혔다. 큰 아이 따라다니느라 작은 아이는 뒷전일 때가 많았지만 이렇게 세상이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들을 할머니 덕분에 배워나갔다.     


세돌 무렵  노할머니께 숫자를 배운 후 알아가는 숫자가 늘어갔다.


작은 아이는 여전히 숫자를 좋아한다.  예전보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모든 게 엄마가 보는 기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노할머니 덕분이다.

작은 집 아이들까지 합하면 4명의 증손주가 있지만 작은 아이처럼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아이는 없다. 지금도 살아계시다면 예쁘게 자란 아이들을 보며 기특해하셨을 텐데 말이다.     


내가 해준 것보다 훨씬 잘 자란 아이를 볼 때마다 혼자서 키워낸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특히 작은 아이는 더 그렇다. 첫째를 키워보니 빨리 무언가를 가리치는 것보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큰 아이 전학한 학교에 신경 쓰느라 그리고 갑작스러운 시아버님의 암투병으로 사실 해준 것이 별로 없긴 했지만 큰 아이 키울 때보다는 감은 더 빨리 안 것 같다. 기본적인 큰 틀만 있다면 아이의 성향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면 된다. 


큰 아이를 키워보니까 넣어주는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넣어주는 공부는 늘 한계에 부딪었다. 오히려 마음을 보듬어주고 넉넉한 마음을 주니 공부도 찾아서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체크하고 감시하는 공부보다 훨씬 더 깊고 멀리 공부하는 것 같다.  내 감정을 다스리고 욱하는 부모가 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었다. 아이를 낳고는 내 마음인데 내 것이 아닐 때가 많았다. 미안하게도 큰 아이에게는 그런 모습을 많이 쏟아냈었다. 둘째를 낳고부터는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는 공부 부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찾아서 했던 것 같다.


플라톤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고 믿고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을 설명할 것인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보이는 것을 우선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존재와 지식을 쌓아갈 것인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나와 아이는 지금 보이는 부분으로 계약을 하는 관계는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 내제력과 잠재력을 믿고 싶다. 


오래된 사진을 꺼내보니 그리운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옛사진을 보는 건 아이를 다그치고 싶을 때 꺼내먹는 약상자 같기도 하다. 이 때는 이랬지하는 추억에 잠겨보기도 한다. 예쁘게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며 한껏 치세웠던 욕심도 내려놓는다. 아이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나를 채워나갈 욕심을 내야 할 것 같다. 


*참고도서

플라톤 <국가>

유성상 <배움의 조건>

백지연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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