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왜 왔어요? 독일은 뭐가 좋아요?”
독일 생활 6년 차, 누구를 만나든지 늘 맞닥뜨리는 질문이다. 언론을 공부하러, 과거청산과 통일,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 훌륭한 사회 인프라, 이 모든 거대담론이 얼마나 사사로운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단어를 입밖에 올리기도 민망하다. 너무나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것들은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니면 독일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앞의 질문에 항상 따라오는 질문이다. 나도 모른다. 당장 내일도 모르는 삶인데 뭐라 답할 수 있을까. 무어라 답하는게 의미나 있을까. 6년 차 나의 결론은 그래서 단 한문장이면 충분하다.
“노브라와 노힐, 노메이크업이 좋거든요.”
한국에서 일하며 신었던 하이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독일로 왔다. 언젠가는 신겠지하며 이고 지고 다닌 지 어언 6년. 지난달에 이사를 하며 미련 없이 모두 버렸다. 물론 의류 재활용함에. 6년간 단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이었다. 하이힐과 함께 바리바리 싸 왔던 화장품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모두 버렸다. 마지막으로 브래지어를 산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브라를 하든 안 하든, 화장을 하든 화장을 하지 않든, 명품을 걸치든 거적때기를 걸치든, 운동화를 신든 하이힐을 신든 그건 모두 개인의 자유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 오롯한 개인의 자유. 그리고 그 모든 개인은 옳다. 누구도 개인의 자유를 혐오할 권리가 없으며, 개인의 자유를 혐오할 필요도 없다.
베를린 길거리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다. 화장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브라를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하이힐은 그냥 안 신는다. 독일이 뭐가 좋아요? 라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확실한 답은 ‘고작’ 그것뿐이다. 혐오당하지 않는 내 자유.
독일이 좋은 이유가 사소해 보이는가? 사실 그렇다. 세상에는 바로잡아야 할 거대하고 중요한 정치 역사적 이슈가 너무 많다. 나는 독일의 미디어를 공부하고, 독일 통일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독일이 나치 청산을 어떻게 해 왔는지, 거기에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한국에 알리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이곳까지 왔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느끼고, 자유에서 희열을 느끼며 그것들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일에도 혐오와 폭력이 있다. 이곳에서 개인인 나는 자유롭지만 ‘아시아 여성’인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독일에서 나는 인종차별에 성폭력이 더해진 이단 콤보 공격을 받는다. 그 혐오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독일 회사 호른바흐의 광고였다. 땀에 절은 백인남성의 속옷 냄새를 맡고 절정에 이르는 아시아 여성을 찍은 광고를 보고 무려 ‘존재’의 위협을 느꼈다. 광고 속 아시아 여성이 나를 겨냥한 건 물론 아니었다. 불특정한 이미지로 가해진 혐오였음에도 나는 어마어마한 수치심과 분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에서도 개인의 삶을 온전히 가지고 가기 위해서는 매일 투쟁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혐오당하지 않을 자유 때문에 아직까지는 이곳이 나쁘지 않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모든 것들을 다시 장착할 것이다. 장착해야만 할 것이다. ‘너 브래지어 꼭 해’, ‘너 화장 좀 해’, ‘너 살 좀 빼’, ‘너 예쁘게 좀 하고 다녀’라고 누구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러지 않을 때 돌아오는 혐오를 알기에. 그걸 알기에 나혼자 강요당하는 부자유. 한국 길거리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다.
그 와중에 생각한다. 한국의 길거리에서 100% 자유롭고자 했던, 그저 온전한 개인이고자 했던 존재의 삶이 얼마나 전투적이고 치열했을지. 매일매일 혐오와 싸우면서 얼마나 존재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왔을지. 남성으로 가득찬 뉴스 화면과 온갖 거대담론 앞에서 설리의 죽음은 또 얼마나 하찮게 잊혀져갈지.
2019년 10월 29일 미디어오늘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