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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스박씨 Mar 23. 2021

초롱 눈망울

아이를 통해 낯선 세상을 읽다 - 10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까지 한참의 다가감 이후에나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집 전화를 통해 약속을 미리 잡아야하고, 집에 찾아가 한참을 함께 시간을 보내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시절. 친구의 마음을 얻기위해 편지를 써야하고, 종이학을 접어 조심스럽게 건네던 시절.

넘쳐나는 소통(social)이라는 이름으로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고, 아무런 기준없이 작은 사진과 몇몇 공개된 정보만을 가지고 친구를 할 것인지, 거절을 할 것인지 결정한다. 그런 쉬운 접근성은 친구의 개념을 흐리게, 소통의 개념을 희미하게 한다. 과거보다 더욱 자유롭게 소통하는 많은 친구들이 온라인상에 존재하지만,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관계의 목마름 가운데 놓이기도 한다. 타인의 기쁨도, 타인의 슬픔도 수 없이 흘러드는 소통으로 인해 스크롤하던 엄지를 잠시 멈춰 반응하는 것 정도로 충분한...

너무 쉽게 가벼워져버렸다.


나에게는 조금은 위험한 운전습관이 있다. 중앙 백미러로 뒤에 오는 차를 보지 않고 재하의 얼굴에 고정시켜놓는 것. 재하가 1살 때쯤이 었을까. 운전하다가 언뜻 본 재하의 눈이 평소같지 않았다. 무심코 몇번을 넘겼는데 어느날 아내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재하 눈이 좀 이상하지 않아???
응. 뭐 아직 애라 그런가보지...

나는 상황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 아내의 생각이 걱정의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진정시키려 시도했다. 지금 그때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아니였으면 하는 현실부정이었던 듯하다. 그렇게 며칠을 더 지켜보았다. 카싯(Car seat)에 조그만 몸을 싣고 웃어주는 재하는 그대론데 우리의 마음이 달라졌다.


간헐적 외사시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발견한 병명. 아이가 피곤을 느끼거나 멍할 때 한쪽 혹은 두쪽 눈이 밖으로 빠지는 사시의 일종이었다. 인터넷에 '초롱 눈망울'이라고 하는 사시 아이를 둔 부모들의 모임이 있을만큼 꽤 흔히 볼 수 있는 안질환이라고 한다. 재하의 경우 왼쪽 눈에 이상이 있었고 특히 차에 탓을 때 증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왼쪽으로 빠진 눈을 볼 때면 마음이 철렁내려 앉았다. 수술 외에는 완치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을 알고나서는 더욱 더 모든 신경은 재하의 눈으로 향했다. 그 뒤로 나는 백미러를 항상 재하의 눈에 두는 버릇이 생겼다.


아시아인으로도 살기 힘들텐데 장애를 안고 상처가 되지 않을까. 

저 작은 눈에 칼을 대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 

훈련으로 나아지지 않을까. 

혹시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까. 

수술을 해야된다면 언제 해야하지.

몇살에 해야하지...


시간이 흘러 이제 재하가 6살이 되었고, 증상은 여전하다.  미루고 미뤄왔던 수술도 올 여름으로 잡혀있다. 어떠한 사실도 변하지 않았는데, 백미러로 재하를 바라보는 내 습관도 여전한데, 불안감은 사라졌다. 

왜일까? 그저 아픔의 감각이 기억에서 멀어지면서 고통도 잦아들 듯 그런 이유에서 일까?


관계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더욱 가깝게 만드는 것은 좋은 기억들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언제나 우리는 좋은 일들로 우리의 삶이 채워졌으면 하고 바라지만, 실상 우리를 자라게 만드는 것의 많은 것들은 눈물도 담겨져 있다. 슬픔을 함께 이겨낸 기억, 아이의 아픔을 공감한 기억으로 인해 아내의 배로 낳은 아이는 다시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가 깊게 자리한다. 

강인함과 따뜻함 사이

미래에 안게 될 아이의 상처에 대한 불안감이 잦아들고 나면 두가지 현실적인 선택 앞에 서게된다. 아이에게 상처를 이겨낼 강인함을 심어주거나 이겨낼 자존감을 심어주거나.

강인함을 심어주는 부모의 내면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 내면에는 세상을 이길 힘은 강인함에서 온다는 생각을 볼 수 있다. 남들보다 더욱 냉철하고 더욱 단단한 심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 세상이라는 판단에서 아이의 어린시절 아이가 부모 밑에 있을 때 작은 준비들을 해나가는 것일테지. 

따뜻함을 주고자 하는 부모의 내면에는,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비해 너무나 작고 연약한 아이에 대한 측은함이 깔려있다. 어차피 세상을 통해 겪게될 상처들을 굳이 부모 밑에 있을 때부터 갖게 해야할까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아이가 상처와 싸우는데 인생을 보내길 원하지 않았다. 상처를 상처로 느끼지 못할 만큼의 사랑을 주고 싶었다.

부모가 준 사랑이 충분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쯤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을 주고 싶었다. 강인함 또는 우월함으로 상대방에게 자괘감을 주며 희열을 얻는.. 그런 존재가 되는 재하를 상상할 수 없다. 

불안감을 마치 없는 것처럼 마음 한켠에 감추고 재하에게 따뜻한 미소를 전해줬다. 굳은 살은 세상을 겪으며 재하가 맞게될 바람만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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