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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마 Dec 26. 2024

나의 자식에게서,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봅니다.

그 시절,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 부모님의 사랑을 봅니다

도리-도리-도리-도리, 잼-잼, 잼-잼, 짝-짜꿍, 짝-짜꿍,
OO아, 함미 봐봐, 짝짜꿍 할까? 짝-짜꿍, 짝-짜꿍,

"이거 봐, 얘 이렇게 하면 손바닥을 핀다니까? 잼-잼은 따라 하려고도 해."

이제는 적응이 좀 되었지만 처음엔 어색했던 노래들, 행동들. 귀여운 딸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들로 온 집안이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귀에 익은 듯, 언젠가 어디에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잼-잼 소리가 귀를 맴돈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멜로디 같다가도..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 같다가도.. 이내 내 어린 시절 한켠에서 들어봤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저랬을까?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가며 소리에 맞춰 웃음을 지었을까? 내 기억 속 한 귀퉁이 아주 작게 자리 잡은 기억을 애써 꺼내어 보려 했지만 이상하리 만치 익숙함만 느껴질 뿐, 기억이 나질 않는다.



"헤헤헤헤헤, 깔깔깔깔"
"파하하하, 아휴 저 솜사탕 같은 웃음을 어떻게 할꼬" 

엄마 아빠가 지어낸 이상한 동작에 깔깔깔 소리를 내 웃는 손녀의 웃음에, 할머니는 몸도 마음도 녹아내린다.


자식을 낳아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을 배울 수 있다고 했던가, 구태어 자식을 낳지 않더라도 부모의 사랑은 늘 넘쳐나고 느끼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식을 낳은 후에도, 전에도 나에게 부모님이 주신 사랑은 늘 넘쳐흘렀다. 

자식을 낳아야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보다 더 젊은 시절 우리를 키워낸 그 시절에 부모님의 사랑이다. 능숙하게 아이를 안는 모습, 아이를 달래는 모습, 젖병을 들고 밥을 먹이는 모습까지.. 그 시절 우리를 키워냈을 부모님의 모습, 그리고 사랑을 본다. 



쭉-쭉-쭉, 어깨 쭉!, 쭉-쭉-쭉, 다리 쭉!, 쭉-쭉-쭉, 코 쭉!

"푸하하, 그거 되게 기분 좋았었는데, 들으니까 확실히 기억이 나네."
"그래? 이게 기억이 나?"
"응, 그거 되게 기분이 간질간질 좋았었어, 잠이 깨는 듯하면서도 편안해서 다시 잠에 드는 그런 기분"

확실히 기억나는 간질간질함이었다. 어린 시절 잠에서 깨면 엄마는 내게 항상 이 마사지를 해주었다. 묘하게 잠이 깨는 듯하면서도, 묘한 간질거림에 다시 잠이 들 것만 같은 아주 몽글몽글한 기분이었다. 기억 속 어렴풋이 남아있던 것들이, 다시 엄마에게서 시작되어 우리 딸에게 전해지는 그 모습과 소리를 들으며 형용 못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유난히 날 좀 닮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딸아이에게 마사지를 해주며 웃어주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을 찍는 카메라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엄마의 저 모습에서 얼굴과 팔의 주름만 조금 없앤다면 그 젊은 시절 엄마의 모습일까?



내가 기억도 못할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꽤나 가난했다고 했다. 돈을 벌러 나가야 되는 상황에 아이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어 이모집 근처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모집 근처 작은 집에서 형을 키웠다고 했다. 지금처럼 일회용 기저귀가 많던 시절도 아니고, 있었다 한들 여유 또한 없었으니 엄마는 몇 개의 천기저귀를 손수 빨고 말려가며 우리 형과 날 키웠다. 악착같이 벌고, 아끼며 우리 부모님은 두 아들을 모자람 없이 키워냈다. 집 안에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 화장실조차 한번 편하게 갈 수 없었던 그런 집에서 우리를 키워냈다.


손녀가 자꾸 손을 빠는 데, 손 대신 빨 수 있는 걸 좀 사주면 어떻냐는 말에 우리는 치발기를 주문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우리가 주문하지 않은 못 보던 치발기 시리즈가 생겼다. 중국산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만든 치발기를 고르고 골라 주문했다며, 근데 그중에 어떤 건 이미 손녀가 쓰기에는 시기가 지나버린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손녀에게 사주고 싶은 물건을 사주며 좋아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어린 시절 땡삐, 땡깡 등 강력한 별명을 여러 개 가지고 있을 만큼 떼를 많이 썼다고 했다. 갖고 싶은 걸 안 사주면 표현 그대로 길바닥에 드러누워 소리를 지르며 사달라고 떼를 썼다고 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꾸짖지 않고, 조용히 옆에 서서 떼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잠잠해지면 "이제 집에 갈까?, 응" 하고는 집에 데리고 갔다고 했다. 몇 번이나 들은 얘기였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어머니는 정말 내 성격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가지고 싶다고 모든 걸 가질 순 없다는 걸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주고 싶지만 사줄 수 없는 상황에 애써 슬픈 맘을 억누르고 한 발자국 떨어져 기다리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유로워진 마음과 경제적인 여건 덕에 지금은 손녀 치발기쯤이야 손쉽게 주문할 수 있지만, 아끼고 아끼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 때문인지 아직도 고민, 또 고민해 물건을 고른다. 갖고 싶은 옷은 없는지, 먹고 싶은 음식은 없는지 묻는 말에 "내가 언제 뭐 먹고 싶다고 하는 거 봤니~?", "난 이 옷이면 충분하다 이거 좋은 거야~"라며 넘어가는 엄마였다. 우리 가족은 원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해 아울렛을 잘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는 가격표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아울렛 이곳저곳을 손녀 사줄 옷은 없을지, 장난감은 없을지, 책은 없을지 하며 누빈다.



내 어린 시절의, 젊은 우리 부모님을 본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엄마의 엄마를 본다.


손녀를 처음 안은 아버지는 한평생 보여준 적 없던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밝은 미소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엄마와 나는 "이야 아빠가 저런 표정도 짓네" 하고는 웃었다.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니 비슷한 웃음을 본 적이 있었다. 돌이 채 되지 않은 나와 그런 나를 번쩍 들어 안은 아버지의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먼저, 가장 따뜻하게, 가장 크게 웃어주었을 아버지의 미소를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 

우는 손녀를 달래는 모습, 재우는 모습, 노래와 율동을 하며 놀아주는 모습. 지금이라도 막 울 것 같은 손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흉내 내는 이상한 동물 소리와 옛날이야기 속 주인공의 이상한 목소리까지.. 어느 하나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시감처럼 느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어느 한 켠 고스란히 내 속에 쌓였을 사랑들이 이제는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삭의 배로 장성(태백의 한 지명)에서 대구까지 기차를 타고 옷을 팔러 다니던 외할머니는 기차에서 어머니를 낳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야기가 우리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외할머니는 그래서인지 막내딸을 소중히도 아꼈고, 그런 막내딸이 낳은 늦둥이 손자를 옥이야 금이야 키우셨다. 어린 시절 기억 한켠에는 얼핏얼핏 어머니의 모습과, 날 등에 업고 가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함께 있다.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꽤 오랜 기간 같이 사셨다. 외할머니는 19년생(당연 1900)으로 나이가 정말 지-긋했음에도 가만히 쉬는 날이 없었다. 자꾸만 자꾸만 집안일을 하시고 움직이셔서 어머니의 화를 듣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중에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말고 말 좀 이쁘게 하라며 화를 냈다.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배운다고 했던가, 어머니는 손녀를 만나 할머니가 되어서야 자신의 엄마가 끊임없이 움직이던 그 이유를 자꾸만 주고 싶은 사랑임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쉬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외할머니에게 화를 내던 어머니의 말이 노년에 자신을 낳아 고생만 한 엄마의-엄마를 향한 사랑임을 배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과 죽음 


눈에 초점이 없어 초점책을 보던 아이는 어느덧 좋은 것을 보면 웃고, 싫은 것을 보면 소리 질러 싫다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눈 깜빡할 새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자랐다. 

주름 하나 없던 한 아이의 엄마는 좋은 것을 보면 웃고, 싫은 것을 보면 소리 질러 싫다 표현하던 자신의 아이가 데려온 아이를 보며 웃고 있다.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목과 팔의 주름을 보며 세월의 야속함을 느낀다. 


새하얀 피부의 빵긋빵긋 웃는 딸과 그런 딸을 보며 웃는 엄마의 모습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탄생이 있기 위해 죽음이 있고, 그리고 그 죽음은 우리가 피해 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저 빵긋빵긋 웃는 저 미소를 조금 더 자주 더 많이 바라보며 행복감 속에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떠나는 날 자신의 삶이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


사랑 속에 자라나고, 사랑 속에 늙어가고, 사랑 속에 떠나갈 수 있기를.




절 오랜 기간 봐오신 작가님이 계시다면 조금 놀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꽤나 오랜만에 전하는 제 소식이 결혼도 스킵하고 아이의 소식이 되어버렸으니요 ㅎㅎ 남은 인생을 함께할 최고의 동반자를 만나 한 평생을 약속했고, 소중한 딸아이를 만나 한평생 몰라왔던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도 그 결은 같지만 조금은 변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24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24년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고,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한 해였습니다. 앞으로의 1년, 또 1년, 하루, 또 하루 더 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렇게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길 빌어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사랑하는 나의 동반자와 우리 딸, 그리고 가장 큰 버팀목이자 사랑인 @샛별 작가님께 감사와 사랑을 담아 전합니다. 


* Main photo by 하노마

** Photo by Jeong Yejune(Unsplash)

*** Photo by 하노마, 글 속 손녀를 둔 할머니이자, 아들을 둔 엄마와 함께한 남원의 한 다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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