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를 사랑하는 법
첫째 아이인 바다를 닮은 동물을 꼽자면 자신만만한 고양이가 떠오른다. 양가의 장손이라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스스로도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엄마도 내가 제일 좋지?'라고 자신만만하게 묻는다. 그에 비해 알송이와 달송이는 애정을 갈구하는 두 마리의 강아지 같다.
지난 주말 저녁. 자기 전, 품에 안고 토닥이던 알송이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나랑 달송이중에 누구를 더 사랑해?"
오늘 아침. 유치원 현관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나에게 달송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 알송이는 왜 두 번 안아줘?"
세 살이 될 무렵부터 2년째 꼬박 듣는 레퍼토리이다. 자그마한 아이들의 커다란 갈증이 안쓰럽다. 내 마음의 방을 미리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은 청초한 빨강, 알송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선명한 노랑, 달송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달콤한 분홍일 것이다. 아이들을 닮아 제각각의 빛과 향기를 지녔겠지만 분명 같은 밀도와 질량일 내 사랑을 확인시켜 줄 방법은 없을까. 쌍둥이 부모가 되면, 온전히 '나'를 다 녹여내면서 육아를 한다. 백일정도까지는 향후 몇 년의 체력을 끌어다 쓰는 체력전이다. 그러나 아이의 발달 단계에 따라 점차 몸을 쓰는 육아에서 마음을 쓰는 육아로 변해간다. 알송이와 달송이를 키워 온 시간을 되짚어본다.
생후 6개월. 누워만 있던 아이들이 뒤집고 기어 다니면서 시야가 넓어졌지만, 여전히 양육자가 눈앞에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알송이와 달송이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지만, 눈에 띄는 경쟁은 없었다. 대신, 이 시기부터 한 아이를 안으면 다른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질투라기보다는 나와의 애착이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이윽고 무릎에 앉히면 알송이가 기어 와서 달송이의 옷을 잡아당겼다.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조금씩 더 많은 엄마의 온기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12개월을 돌파하고 걸음마를 시작한 쌍둥이는 계란후라이보다도 작은 발로 아장아장, 그러나 부지런히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빨래를 꺼내는 나를 쫓아와 보챘다. 유리너머로 분명히 엄마가 보이는데, 미닫이였던 베란다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단내 나는 침을 듬뿍 바르며 공격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나의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은 점점 잦아졌다. 한 아이를 안고 있으면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갑자기 '여보세요', '빠이빠이', '곤지곤지', '짝짜꿍' 등의 개인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장난감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되면서 다른 쌍둥이부모처럼 마음의 변화를 실감했다. '동시에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에서 '원하는 만큼 사랑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로 흐르는 생각에 자주 울었다. 두 돌 무렵까지 서로 깨물고 꼬집는 행동도 잦았는데,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을수록, 내 품은 자꾸만 작아지는 것 같았다.
24개월이 된 쌍둥이는 소유의 개념이 형성되더니 말랑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꼬야!', '쩌기로 가!'라고 앙칼지게 외쳤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이르면 갑자기 '엄마 조아. 엄마 안아조!'라면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어쭙잖은 시도를 했다. 같은 붕붕카를 두 대나 준비해 놓았는데도, 아이들은 굳이 하나만 고집하며 서로 밀고 당기고 울었다. 과자 한 봉지를 나눠줘도 충분한 설명이 필요했다. 각자의 간식그릇에 똑같은 개수로 담아 눈앞에 놓아주었다. 잠시라도 내가 눈을 돌리면 먹성이 좋은 알송이는 달송이 그릇의 간식에 손을 뻗었다. 하루의 절반을 다투고 울었다. 사랑을 주는 일이 때로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까 봐 자주 망설이게 됐다.
꾸벅꾸벅 졸면서 분유를 먹이고 마른세수 한 번으로 피곤을 삼켰다. 아이를 안아 들고 트림을 시키려 창가를 서성였다. 깍-하는 예쁜 소리가 고마워서 몇 분 더 안고 있었다. 기저귀를 갈려고 눕히니, 내려앉은 새벽이 무안할 만큼 환히 웃으며 눈을 맞추던 알송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나의 아이로 와줘서 고맙다고 사랑을 노래하고 침대에 눕혔다. 나의 마음을 안다는 듯 검지를 움켜쥐던 작은 손. 그 옆에서 고소한 분유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던 달송이. 쌍둥이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법한 추억이 내게도 짙게 아로새겨져 있다.
36개월이 된 쌍둥이는 문장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엄마는 달송이만 예뻐?', '나는 엄마랑 똑같이 생겼지?'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서로가 쌍둥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이해하고 사이도 돈독해졌지만, 그만큼 타는 목마름으로 부모의 애정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에 내 가슴도 메말라갔다. 쌍둥이만 키워도 벅찬데, 위로 한 살 터울 바다까지 있어 늘 아이들 사이에서 마음이 조급했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바다의 마음을 위로하고 쌍둥이의 눈치를 보았다. 알송이가 장난감에 몰두할 때, 달송이 귀에 사랑을 속삭였다. 달송이가 먼저 잠든 밤, 알송이만을 위해 개사한 동요를 나지막이 불러주었다. 안겨있는 아이에게 오늘은 빈틈없이 행복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떼지 못했다.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답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면, 아이들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내 모든 순간이 아이들이기에 내 마음의 오두막 세 채도 점점 넓어지지만 아이들은 아직 그걸 알지 못한다.
이제 48개월이 된 쌍둥이. 생각의 뿌리가 단단해지면서 스스로와 상대를 비교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은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의 수준이 향상되어 이따금 내가 당황한다. 아이들의 마음이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자주 앞질러 갔다. 내 설명이 부족하거나 마음을 놓칠 때면, '나 서운해.', '지금은 말 안 할래.' 하며 방으로 향했다. 아빠의 짓궂은 장난에 햇살처럼 웃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달송이가 내게 '아빠는 왜 바다오빠만 사랑할까?'라고 잔잔하게 묻는다. 오빠의 즐거운 시간 방해하지 않으려다, 결국 내게 기대기로 했다. 당장의 서러움은 덮었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이렇게 귀한 너희가 어떻게 손을 마주 잡고 내 생에 걸어왔는지, 눈물겹도록 감사하다. 그래서 미안하다. 나는 바다를 낳고서야 내가 이런 큰 사랑을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쌍둥이를 낳고는 마음의 빗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이 확장되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에 나조차도 놀라웠다. 남은 숨을 모두 줘도 아깝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세 아이를 같은 온도로 바라볼 수 있었다. 솔직하고 진취적인 바다는 맑고 붉은 방을 내 마음속에 뚝딱 만들어 놓았다. 명랑하고 사려 깊은 알송이가 향기로운 노랑이었다. 섬세하고 다정한 달송이는 분홍을 택했다.
나는 칭찬에 민감한 바다에게, 알송이가 벗은 옷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다. 바다는 동생을 도왔다고 칭찬포도스티커를 하나 받는다. 고기반찬을 좋아하지 않는 달송이에게도 고기반찬을 좋아하는 알송이처럼 세 개를 준다. 그러면 알송이는 달송이에게 먹기 싫으면 하나 먹어주겠다고 선심을 쓴다. 나는 모른 척, 달송이에게 말한다. "두 개는 달송이가 먹어야 해. 알겠지?" 그렇게 알송이는 반찬 네 개를 즐겁게 먹었고, 달송이도 두 개쯤은 만족스럽게 먹었다. 쌍둥이는 각각 칭찬포도를 받는다. 달송이는 알송이에게 양보했으니까. 알송이는 곤란한 알송이를 도와준 거니까. 너희는 결코 모르겠지.
언젠가 너희가 내 마음의 오두막을 발견할 날이 올 거야. 그땐 알겠지. 사랑의 모양만 달랐을 뿐, 진심은 같았다는 걸 말이야. 나는 처음부터 너희를 같은 밀도와 질량으로 사랑했단다. 다만, 너희는 그 사랑을 담은 방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야. 엄마는 정말로, 단 한 번도 너희를 다르게 사랑한 적이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