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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Mar 08. 2018

#1. 기억과 감정

혜준

  인간의 두뇌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다. 감정은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 만을 남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는 것이다. 

나쁜 기억을 모두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하거나, 좋았던 기억은 기억하지 못하고 나쁜 것 만을 기억한다. 누구의 기억이든 그것은 온전히 타인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이 첨가되어 오랜 또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남은 기억을 과연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에 대해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 것은 다 그녀 덕분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완전히 잊고 지낸 그녀가 5년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떠올랐다. 15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내가 5년이 지나고 문득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지났다. 한 때 그녀라는 존재는 나에게 끔찍한 존재였다. 우연히라도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내 아픈 과거였다. 그런 그녀와 완전히 연락히 끊기고 다시 5년 뒤 새삼 떠오른 것은 내 경우에 전자였다. 그녀와 함께한 10년의 시간이 내게는 소름 끼치는 아픔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난 그 아픔을 모두 싹 잊었다. 아니, 감정이 전혀 남지 않았다. 그녀와의 시간 속에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그녀의 가장 예쁜 모습 만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살다가 새삼 그녀를 떠올렸을 때, 내 기억 어디에도 그녀에 대한 나쁜 감정은 없었다. 내가 그녀 때문에 마지막에 무척이나 아팠던 것, 괴로웠던 것, 슬펐던 것, 그리고 나 역시 그녀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던 것, 참 많이 나쁜 여자였던 것, 내가, 그녀가, 우리가 서로에게 참 나쁜 사람이었던 결과가 하나의 명제처럼 기억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감정이 사라진 기억이 그렇게 그녀를 다시 소환했다. 


"라영아, 너 혜준이랑 아직 연락해? 아니다. 연락 끊은 지 꽤 오래되었다고 했나? "

내가 3년 만에 한국에 갔을 때 윤하가 말했다. 


"그 왜 있잖아? 걔가 자기 실적 너무 안 나왔다고 계속 속상해해서 내가 들었던 그 보험 있잖아. 그거 해약하면 얼마나 나오나 물어보려고 연락했는데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전화를 받더라고."

푼 돈이긴 했지만 보장 내역도 거의 없고 70세 만기로 잡았던 보험이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한 때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하며 지점을 확장해가던 그 보험사가 소리 소문도 없이 지점이 확 줄어든 이유도 있었다. 


"아. 짜증 나. 내가 그때 이 보험을 왜 들었나 몰라. 나 안 그래도 보험 많은데.."

그녀의 볼멘소리에 너무 미안했다. 


"아.. 내가 미안. 그때 그냥 하지 말라고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야! 됐어. 왜 네가 미안해. 너도 걔 때문에 보험 들었다가 꽤 오래 붓다가 해지했잖아. 넌 이제 한국에 살지도 않아서 그 보험 필요도 없는데."

그녀가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나도 그녀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보험 계약을 했던 적이 있었다. 본전 생각이 났어도 밀리지 않고 열심히 유지해가고 있었는데 독일로 이주하고 한국에 자주 들어가는 일이 없다 보니 유지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한국의 은행 계좌에 일정 돈을 항상 유지하고 있으려면 뱅킹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이핀, 개인 정보를 수시로 업데이트해줘야 했는데 의외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혜준이랑 연락됐어?"

나는 입안에 맴돌던 말을 몇 번이나 고민하다 넌지시 물었다. 


"아니. 새로 지정된 설계사가 있다고 그 사람이랑 진행하면 된다고 해서 안 했는데, 혜준이 연락처 필요하면 알려 줄 수 있다고 하던데...... 너 설마 혜준이 연락해 볼 생각인 건 아니지?"
"아.. 아니야. 얘."
"됐어. 너 백 프로 후회해. 절대 하지 마. 하지 마라."

20년 동안 나를 지켜본 윤하는 내가 연락해 볼까 하는 마음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선수를 쓰는 그녀에게 본심을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애초에 꼬리를 내렸다. 


"너 설마 다 잊은 거 아니지? 혹시 잊었으면 말해라. 내가 낱낱이 알려줄 테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정말 많은 감정을 잊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부분 기억상실증이 병처럼 도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 허무맹랑한 망상이 무색하게 그녀와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쳤다. 

그랬다. 나는 모두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감정은 눈과 같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복이 쌓이기도 하는 가하면 시간이 지나고 좋은 날들이 따뜻한 볕처럼 내리면 언제 그랬던 듯, 또 사르르 녹아 없어지기도 한다. 감정은 새하얀 눈과 같아서 다른 감정에 휘둘려 색을 잃기도 쉬웠지만, 별거 아닌 눈꽃송이가 모이고 단단해져서 눈사람을 만들 듯 순식간에 키우기도 쉬웠다. 그리고 나는 추운 겨울을 지나 꽃이 피고 비바람에 떨어진 낙엽 더미 한편에서 지난겨울, 미처 녹지 않고 꽝꽝 얼어있는 얼음 조각 같은 눈 꽃 하나를 발견했다. 그 감정 조각이 가을 끝 햇살 한 줄기에 슬며시 녹아버렸다. 감정이 녹아내린 그 자리엔 혜준,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 움실움실 움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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