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 오일, 이천십칠 년
요즘 내게 시간은 말 그대로 빛의 속도와 같다.
물방울이 아래에서 떨어지는 만큼,
바람이 나를 쓸고 지나가는 만큼,
빛이 내게로 떨어지는 만큼,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순간을 느끼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모든 순간을 담아두고 싶은 내 욕심에 반해 턱없이 부족한 내 기억 세포들은 오래된 기억부터 차근차근 지워버린다. 때문에 이제는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끼기도 전에 벌써 엊그제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난 어제와 그제를 산 것 같지 않은데 벌써 내일을 살고 있다.
이제 내 나이 겨우 마흔인데, 시간의 속도감은 이미 말년을 사는 기분이다.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갖기에 여자로서 최후 일각에 있기 때문인 듯싶다.
묵주를 집어 들고 한두 시간씩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한 지 일흔 하고 이틀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는 두 번째 시술에 실패했고 한국으로 도망 온 지도 벌써 스무날이 되어간다.
한국으로 나는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왔다.
늘 그리웠던 가족이 있고 십년지기, 이 십년지기 친구들이 있는 고향이기에 고민하지 않고 왔다.
타지에서 아무리 좋은 시부모님이 계시고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다고 그들이 내게 채워줄 수 있는 영역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었다.
그들이 내 가족, 내 친구들에게 받았던 지난 반 팔십의 시간들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타지에서 내가 산 시간이 이제 겨우 5년 남짓이지만, 그 시간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어도 나는 그곳에서 영원히 이방인이다. 처음에 멋모를 때나 현지화에 대해 긍정적인 희망이 있었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았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너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도 같은 선택을 하겠느냐고.
나는 언제나 그 질문만큼 바보 같은 질문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니까. 그런 일은 어쨌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으니까.
그래도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나는 언제나 "응"이었다. 주저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멍청한 질문 앞에서 고민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같은 선택을 할까?'
지금 결론은 모르겠다. 내가 선택한 것은 오로지 사랑 하나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지금까지와 다른 사랑. 그것 하나였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지만, 나는 사랑 하나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이 너무 많았다.
포기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쓸 수밖에 없는 것도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가족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든지...
조카가 커가고 내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든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나무의 잎이 초록이고 해가 뜨고 지는 것, 밤과 낮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변에 무수히 많은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것.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그런 것이었다.
오랜만에 뵌 부모님은 또 그새 한 움큼 나이가 드셨다.
형부가 돌아가시고 보낼 때 내가 함께하지 못했던 것처럼 어쩌면 나는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문득, 그것이 너무 서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설움이 복받쳤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그 설움이 더해져 세상 서럽게 울었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네가 선택했잖아.
내가 선택했던 건 이런 삶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사랑 하나만 선택했다고 말했지만, 그 사람도 알고 내 결혼을 반대했던 우리 언니도 알았고 모두 알았다.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았던 것이다.
나는 사랑하나를 선택했지만 그로 인해 너무도 당연했던 수많은 것들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철없던 사람이라,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았다.
세상에 운명이란 것이 없고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때는 지금쯤 나도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을까?
그때 나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어떤 선택에든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부수적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