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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돈 Mar 31. 2019

아이리쉬 카밤

인생은 쓰지만, 지금은 달콤하게


어떤 숙취해소 음료에 적혀있던 문구였다. 음료의 맛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문구만은 똑똑하게 기억난다. 편의점에서 술과 함께 그 숙취해소 음료를 사 오며 오늘 밤은 달콤하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더랬다.


인생이 쓰다고 말하기엔 아직 민망한 나이일 것이다. 20대 끝자락에 서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맘 편히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느껴가고 있지만, 살아온 세월 동안 풍파를 겪은 부모님 세대 앞에서는 번데기 주름잡는 셈일 것이다. 다만 그들이 극복해낸 세월이 쉽지 않았음을 조금씩 공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당당히 할 수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바랐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음을.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눈치 보는 일은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계획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았고, 내 머릿속 창창한 미래는 점차 불투명해지기 마련이었다. 불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어떻게 해야 더 나은 길을 갈 수 있을지 고민하지만, 대학생 때와 달리 나이 30에 다다른 지금 선택의 폭이 대폭 줄어들어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나이가 한두 살 늘어갈수록 나의 사회적 잠재력이 감소하고 있음을 몸소 느끼게 된다.

악순환이다. 이런 식으로 암울한 생각을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어두워진다. 생각을 멈춰줄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 술이다.


간혹 패배감이 들거나 우울해질 때, 무언가 마셔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아이리쉬 카밤이다. 소주 칵테일의 일종인 '고진감래'의 아일랜드 판이라고 해야 할까. 쌉싸름한 술 끝에 달콤한 마무리가 있는 것으로 치면 같은 카테고리의 칵테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일랜드의 술만으로 이루어진 칵테일로, 아일랜드 맥주인 기네스 드래프트, 아이리쉬 크림인 베일리스, 아이리쉬 위스키인 제임슨으로 만들어진다. 두 개의 잔이 필요한데 기네스 전용 맥주잔에 기네스 드래프트 를 3/4 정도 채우고, 스트레이트 샷 잔에 아래층엔 베일리스, 위층엔 제임슨을 플로팅 해준다. 플로팅 한 샷잔을 기네스 잔에 퐁당 떨어뜨린 후 가급적 빠르게 원샷한다.

아이리쉬 카밤(Irish car bomb)

향 따위를 음미할 시간 없이 곧바로 입에 들이붓자 기네스의 차가운 부드러움이 목을 돌파한다. 혀를 따갑게 하는 일반 맥주들의 탄산과는 비교되는 기네스 맥주만의 크리미 헤드가 느껴진다. 탄산이 없지 않지만 이 거품들이 혀를 감싸 따가움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사이 특유의 구수함이 코로 가볍게 올라온다. 벌컥벌컥 마시다 보면 안에 들어있던 샷잔이 내 입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온다. 사실 제임슨의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빠르게 맥주와 섞여 그 안으로 퍼져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쉬운 일이다. 제임슨은 분명 가볍게 마시기 편한 위스키지만 기네스 안에서도 그 맛을 주장할 만큼 개성이 강하지 않다. 잔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베일리스의 달달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따뜻하다. 베일리스도 냉장 보관했기에 따뜻할 리가 없지만 두꺼운 크림의 느낌이 혀로부터 시작해 입안에 달달하게 퍼진다. 기네스의 부드러움이 차가움 속의 자그마한 반전이었다면 베일리스는 처음부터 강력한 크리미 한 달콤함으로 입안의 평온을 가져다준다.


일주일 중에는 하루가 미웠던 날들이 더 많고, 하루 중에는 행복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다시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이리쉬 카밤에서 쌉싸름한 기네스 속에 베일리스의 달콤함이 숨어있듯이, 우리네의 쌉싸름한 인생 속에서도 베일리스와 같은 달콤함을 간혹 즐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면 오늘 하루에 대한 아쉬움이 머릿속을 맴돌 때가 많다. 직장에서의 업무가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퇴근 후 자기 계발에 소홀했음을, 여가를 보낼 시간을 넉넉히 확보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내일 아침의 개운한 시작을 위해선 오늘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칵테일 한 잔을 만들 준비를 한다.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칵테일을 만들어 마실 때, 이때가 내겐 아이리쉬 카밤 속 베일리스와 같은 시간이다. 아쉬움으로 점철된 하루의 끝자락에서 잠시의 위로가 되어준다. 칵테일을 마시는 시간은 짧고 언제나 부족함이 느껴지지만 여기까지가 후회 없을 내일을 위해 좋다. 이제 다시 내일 아침 눈을 뜰 준비가 되었다. 불 끄고 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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