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겨울
기네스 드래프트를 처음부터 맛있게 먹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 기억에 남아있는 나의 첫 번째 기네스 드래프트는 막 스무 살이 됐을 무렵 친구를 내 집에 초대해 함께 사온 캔맥주를 마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기억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라거 맥주의 시원함을 기대하던 내 목에 닿은 것은 시원하지도, 청량하지도 않은 기네스의 우중충한 부드러움이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맛을 내는 것인지 캔을 분해하여 정체 알 수 없는 볼을 꺼내보기도 하였고, 다신 이따위 맥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기네스에서 긍정적인 맛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작년 이맘때였다.
맥주 덕후인 한 대학 선배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기네스의 매력에 대해 연설을 들었고, 그 선배의 말솜씨는 내 기네스 트라우마를 극복시켜주는 데 충분했다.
'기네스 드래프트는 겨울의 맥주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위로해줄 수 있는 건 일반적인 맥주들이 갖고 있는 날카로운 시원함이 아니라 기네스의 그 부드러움이라더라.
우리는 곧장 근처의 아이리쉬 펍에 가 기네스 드래프트 생맥주를 마셨다.
뭐 탄산은 약하고 맛도 맥주라기보단 묽은 니트로 콜드 브루 같은 게 맛 좋은 맥주라고 표현하긴 어려웠지만,
굳이 예시를 들자면 고등학생 때는 칡즙 맛이라고 표현했던 아메리카노를 대학생이 되고선 향이 좋다고 말하기 시작한, 그러한 변절일 것이다.
그 후로 가장 추운 12월에 나는 4주 기초훈련을 위해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특이하게도 추운 날씨에 훈련을 받고 생활관으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차가운 기네스 한잔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나를 고되게 만들었던 것은 엄한 추위보다도 단절로 인한 상실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핫팩보다도, 굳어버린 상실감을 풀어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술 한 잔이 내게 더 필요했던 것이다.
퇴소 후,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적지 않은 기네스를 마셔왔지만 그때 기대했던 맛은 내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정상적 상황에서 인간이 품는 상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늘 퇴근 후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기네스 전용잔 1개를 1만 원에 구매하면 기네스 드래프트 캔 4개를 주는 패키지를 보았다.
기네스 전용잔은 내 홈바 위시리스트 1순위였기에 구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먼저 집에서 시음해보았다.
다시 돌아온 겨울, 어렵사리 구한 기네스 전용잔에 기네스를 따라 마시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맥주가 혼자 마실 맥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쌉싸름한 부드러움은 일반적인 라거 맥주들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맛으로, 내 뇌리에 깊숙이 박혀버린다. 그리고는 그 순간의 광경마저 기억에 남게 해 버린다.
회상해보면 나는 올해 누구와 함께 기네스를 마셨는지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기억이 난다.
한 잔의 맥주를 마시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지만 잊기 힘든 이 맥주의 맛만큼이나 그 짧은 순간의 추억도 오래오래 회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기네스는 혼자 마시긴 아까운 맥주이다.
올 겨울, 소중한 사람과 함께 기네스를 마시고 그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2018.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