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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돈 Feb 01. 2019

서울의 밤

서울의 밤을 원망스러워했던 적이 있다.


대학원 첫 학기, 밤 12시에 퇴근할 때면 오늘은 좀 일찍 집에 가는구나라며 위안을 삼던 시절, 왜 나는 해가 떠있을 때는 집에 갈 수 없는지 억울해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죄 없는 서울의 밤을 바라보며 한숨짓곤 했다.


여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대로 해가 떠있을 때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아침 동이 틀 무렵에.


7년간의 서울 자취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따라 대전으로 내려온 2017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서울의 밤'이라는 술이 출시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서울을 떠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향수랄 것도 없었던 때이지만 서울의 밤이란 네이밍은 내게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서울의 밤이 내가 자주 가는 대형 마트에 입점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서울의 밤

이렇게 생긴 술이었구나.


이름만 기억하는 술의 실물을 처음 봤을 때 병과 라벨이 참 이쁘다고 느꼈다.


병은 희미하게 청록색 빛을 띤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느끼기 힘든 수준의 빛이다. 병의 모양은 전통주의 호리병 곡선이 아닌 위스키 병의 곧은 느낌을 갖는다. 화요처럼 전통주의 틀 안에 갇히지 않은 현대적 감각의 국산 술병이다. 

'서울의 밤'이라는 글자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구청에 크게 걸려있는 시 한 구절에 흔히 쓰이는 글씨체 느낌이다

다만 그 위의  SEOUL NIGHT라는 글자는 심플하고 시크해 보이는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서울의 밤 원재료

성분은 매실 증류원액에 벌꿀, 포도당으로 단 맛을 첨가하고 노간주나무 열매로 향을 낸 것으로 보인다.


벌꿀과 포도당이 첨가되었기에 일반증류주가 아닌 리큐르로 분류가 되어있다. 술에 단 맛이 첨가되는 것을 제법 싫어하는 나로서는 살짝의 걱정이 앞선다.


노간주나무라면 진에 주로 쓰이는 재료인데 진의 향을 따라한 것인지는 마셔봐야 알 것이다. 진을 사랑하는 소위 '송충이'이기에 이 부분은 기대가 된다.


냄새부터 맡아보자면 향이 강하진 않지만 희한하게 향긋하다.

알코올 향이지만 코를 찌르지 않고, 달달한 향이지만 달착지근하지 않다.

노간주나무 열매가 들어갔다곤 하지만 진의 강한 솔향이 느껴지진 않는다. 전혀 진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차라리 럼의 달달한 향에 더 가까운 듯하다.

전체적으로 향은 만족스럽다. 소주의 역함도, 청하의 인공적인 달달함도, 독주의 강렬한 알코올 향도 없다. 날 듯 말 듯한 알코올 향과 있는 듯 없는 듯한 달달함. 이 아쉬운 듯한 느낌에 매료되어 점점 더 코를 가까이 대어 향을 맡게 만들어버린다.

물론 코로 술을 마실 순 없기 때문에 입으로 음미하는 단계로 넘어가도록 한다.


작은 잔으로 한잔 스트레이트로 마셔본다. 차가운 액체가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동안 알코올의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코올의 맛보다 달달한 맛이 혀를 먼저 코팅해버리는 느낌이다. 흔히들 마시는 과실주처럼 대놓고 달달한 술이 절대 아니다. 청하처럼 은근히 달달한 술도 아니다. 달달한 흉내만 냈을 정도로 단 맛을 억제했으나, 그 단 맛이 알코올보다 앞서 내 혀를 지배한다. 혀를 코팅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 후에야 알코올의 맛과 더불에 약간의 솔향이 코로 올라온다(노간주나무 열매의 향을 직접 맡아본 적이 없으므로 나로서는 솔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절묘한 맛의 밸런스는 진처럼 지배적이지도 않고 보드카처럼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제조사인 더한주류에서 덧붙이는 설명이다.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노간주나무 열매 글자만으로 진의 맛을 상상했지만 절대 진이 아니다. 달달한 향과 맛 덕분에 럼에 더 가깝긴 하지만 럼처럼 거칠지 않다. 단 맛을 첨가한 리큐르지만 끈적하고 찝찝한 단 맛이 아닌 첫 느낌만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간략한 단 맛이다. 도수도 25%로 낮을뿐더러 말 그대로 절묘한 밸런스로 부담스럽지 않은, 튀지 않는 향과 맛을 자랑한다.


'스트레이트로 깨끗한 맛을, 온 더 락으로 풍부한 향을, 칵테일로 완벽한 조화를, '


이 역시 더한주류의 소개 문구 일부분이다.


사실 알코올 25% 정도의 술은 맛이 나쁘지 않은 이상 얼음이나 다른 음료와 섞어먹는 걸 피하는 편이다. 그러나 소개 문구에 이렇게까지 나와있으니, 칵테일까진 아니더라고 온 더 락 정도는 시도해볼 만하겠다.


아이스볼에 서울의 밤을 붓고 음미해보도록 한다.

서울의 밤 온 더 락

향은 좀 더 부드럽고 달아진 듯한 느낌이다. 위스키에 약간의 물을 타 향을 극대화하듯이 알코올이 약해지면서 그 속에 숨어있던 향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맛 역시 약간 달라졌다. 꿀의 맛이 느껴진다. 스트레이트로 마실 땐 달달한 맛을 느끼긴 했지만 어떤 달달함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온 더 락으로 마시니 꿀의 달달함이 느껴진다. 꿀물을 마실 때의 바로 그 달달함이다.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도 부담 없이 부드러웠던 이 술이 온 더 락에서 한층 부드러워짐을 느낀다. 

 

부드러움. 이 술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드러움을 느낄 때서야 이 술의 이름이 왜 서울의 밤인지 알 것 같았다.

내게 서울의 밤은 그랬다. 나를 쉴 새 없이 압박하는 윗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잠깐 잘 수 있는 쉼터로 돌아가는 길, 연구실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는 약 20분간의 시간. 그게 내가 봐왔던 서울의 밤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바라본 밤하늘에 화풀이도 하고 힐링도 받으면서 내 대학원 시절을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밤하늘은 이 술과 같았다. 내가 억울함에 사무쳐 원망할 때에는 스트레이트의 부드러움으로 받아주었고, 아름다운 별 빛으로 나를 힐링해줄 땐 온 더 락의 달달함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서울에는 여전히 깊은 한숨으로 하루를 마무리짓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가 서울에서 그랬고 지금도 대전에서 때때로 그러듯이. 그런 우리들을 말없이 보듬어주는 것이 서울의 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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