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4일
그날을 잊지 못한다.
처음 경찰공부를 하기 위해 노량진에 올라간 지 7개월 정도 됐을 때 순경공채시험을 치렀다. 그때쯤에는 어느 정도 합격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자신 있었다. 전국에서 한 10명만 뽑아도 들어갈 자신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니 모르는 문제가 많이 나왔다. 전국단위로 치르는 모의고사에서 1등을 할 정도로 힘들게 공부를 했었는데 모르는 문제가 많이 나와 당황했다. 시험이 끝나고 채점 전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떨어진 것 같다고, 자신이 없다며 울기 직전의 심정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보기 2개 중에 찍었던 문제들이 모두 맞았다. 운이 정말 좋았다.
2015년 4월 5일
필기시험 통과 후 체력시험과 면접준비를 모두 무사히 끝내고 어느덧 최종합격발표날이 다가왔다. 최종합격 발표 전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분노, 아직 남아 있는 나의 가능성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덮쳐왔다. 혼자 산책을 3시간 정도하고 마음을 비웠다. (지금도 중요한 발표를 기다리고 있을 때는 마음을 비운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나의 마음은 비웠으나 우리 엄마의 마음은 비우지 못했기에 최종발표 날 아침 서둘러 씻고 나가서 혼자 결과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합격발표 문자가 날아왔다. "도민의 자랑 경기경찰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직도 그 문구가 생생하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띠링"울리던 그 문자소리. 엄마와 나는 한참을 부둥켜안았다. 그 이후 온 가족이 집으로 들어왔고 그렇게 내생에 최고의 축하를 받았다.(물론 나는 내가 잘해서 합격한 것이라 생각했고 엄마는 주님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공인지 무엇이 중요한가)
2015년 9월 4일
나는 유독 단체생활을 힘들어했는데 그중 경찰학교에 있던 기간이 너무 힘들었다. 그 힘들던 경찰학교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순경에 임용이 됐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온 친척이 경찰학교 졸업식에 왔다. 대략 15명 정도의 규모로 마치 모일 일이 없었는데 내가 합격했다니 다들 잘됐다 하면서 모인 것 같았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임용을 하고 내 경찰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찰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1년 3개월 만이었다.
2022년 2월
수원에서 7년 동안 경찰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 집을 갖고 싶었다. 천정부지로 솟는 수도권 집값을 바라보자니 이 월급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여 서둘러 타청 전출희망서를 제출했다. 남들은 고향에 가고 싶어서 몇 년 동안 기다리지만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한 번에 고향이 있는 경찰서에 배정받았다. 러키가이가 따로 없었다. 관운이 있는 편인 것만은 틀림없다. 고향경찰서 사정을 몰라 부모님 집에서 가까운 지구대를 희망했고 그대로 됐다. 이후 지구대에서 근무를 했고 다시 한번 느꼈다. 나는 지구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2022년 4월
그렇게 열망하던 내 집을 구매해 이사했다. 이것은 추후 따로 다루기로 한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다 이루어졌다. 경찰이 되고 싶어 하던 나는 어느새 9년 차 경사로 승진을 앞둔 경찰관이 됐고, 고향으로 오고 싶어 하던 나는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 살며 귀여운 조카들을 만나며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 내 집을 갈망하던 20대의 나는 내 집에 번듯한 가전 가구를 두고 아침이면 커피를 내려 마시는 여유로운 30대의 내가 됐다.
그렇게 원하는 것이 됐다. 문제는 이 경찰이라는 직업이 가끔은 버겁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지구대 근무하는 것이 내게는 좀 버겁다. 점점 인류애를 상실하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힘들어진다. 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겁이 난다. 출근을 하고 신고를 나가다 보면 80%의 사람은 술에 취해 있고 그중 30% 정도는 만취해 이성을 잃은 상태로 나를 맞이한다. 그 흥분한 감정에 대한 처리를 만난 지 1분밖에 되지 않은 내가 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 중 10% 정도만 상식적으로 알아들을만한 논조로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어떤 도움을 받길 원하는지 설명한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질 만한데 이것이 내게는 버겁다.
그게 경찰이 하는 일이며 누가 칼 들고 경찰 하라고 협박했냐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렇다며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사실 3년 차, 5년 차쯤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했다. 그때마다 템플스테이며 여행이며 상처를 땜빵하며 버텼다. 지구대에서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 후에는 증상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고향으로 와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지만 별다른 만족 감은 못 느낀 것은 지구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좋게 좋게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하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고 위안 삼아야겠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만나 자기 직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100억이 생기면 본인이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더 여유롭고 좋은 환경에서 할 수 있겠다는 친구의 말에 진심으로 그 친구가 부러웠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만큼 인생에서 큰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은 별로 없다.
이 매거진 제목처럼 그래도 경찰이다. 이것이 내가 밥벌이를 하는 수단이며 우리 부모님이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들의 직업이다.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불평불만만 하지 말고 좀 더 내 직업을 사랑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