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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Sep 02. 2024

덕후의 딸은 덕후가 되었다.

엄마는 임영웅, 딸은 변우석

 친정에 갈 때마다 벽을 야금야금 점령해 가고 있가수 임영웅의 브로마이드며 포토카드를 보면서 참 낯설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엄마가, 어엿한 손자도 있는 진짜 '할머니'가 아들 뻘의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엄마는 기질 자체가 조용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이다. 항상 집에서 얌전히 살림만 하셨고, 어쩌다 외출할 일이라도 있으면 나가기 며칠 전부터 몸을 사리며 힘을 비축하셨다. 그렇게 애를 쓰며 나갔다 오고 나면 기가 다 빨려버린 모습으로 돌아와 몇 날며칠을 골골대곤 하셨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데도 허덕일 정도로 기력이 없는 사람이라, 엄마가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그렇게 쏟아부을 에너지 자체가 없었으니까.


 평생을 그렇게 조심조심 살금살금 살아온 엄마가, 건강했던 사람도 기력이 떨어지고도 남을 70대의 나이에, 일하는 딸 때문에 손자 양육까지 도맡아 하느라 없는 기운을 긁어모아 매일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평생 인연이 없던 '덕질'을 시작하셨으니 쉽게 납득이 되겠느냐 말이다. 게다가 덕질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 나이가 들며 더 힘이 넘치고 건강해지는 분들도 있지만, 엄마는 불면 날아갈 듯한 몸으로 늘 44 사이즈의 옷을 입고,  '나는 귀찮다. 나는 힘이 없어서 못한다. 나는 별 관심이 없다' 에너지 부족 멘트 3종 세트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 엄마가 임영웅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에 젖고 임영웅이 나온 방송을 열심히 찾아보면서 박수를 치며 웃는다. 임영웅이 팬들을 위해 이런 걸 신경 써 줬네, 저런 걸 해줬네, 나는 관심도 없는 '임영웅 미담'을 신나게 전해준다. 엄마가 모처럼 활기차 보이는 건 참 보기 좋았지만, 아들 같은 연예인을 저 정도로 좋아하는 게 가능한가 싶어 엄마를 심정적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변우석의 팬이 되기 전까지는.


 친정에 가서 임영웅의 사진과 맞닥뜨릴 때마다 흠칫 놀라던 내가 변우석의 포토카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닌다. 오늘은 이 브랜드에서 특정 기간 동안만 준다는 포토카드를 예약하고, 다음날은 또 다른 에서 제공하는 포토스티커를 받으려고 해당 상품이 있는 매장을 찾아 헤맨다. 변우석의 과거 영상들까지 부지런히 찾아보는 내 모습은, 임영웅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다 챙겨보던 엄마와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주말에는 임영웅 콘서트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인터넷과 키오스크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를 위해 예매를 하고 티켓 출력을 해 드렸다. 극장 안에 삼삼오오 모이는 활기찬 어머님들은 모습은, 얼마 전 변우석이 광고하는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정확히는 프로모션용 포토카드를 얻기 위해) 매장에 들렀을 때 여기저기서 들뜬 모습으로 사진을 찍던 변우석 팬들의 표정과 일치했다.


 

 팝콘을 담아주는 통에도 야무지게 임영웅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걸 보더니 엄마는 온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변우석 팬인 딸은 그 팝콘통 사진 속 진주 가득 달린 임영웅의 의상을 보며,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비즈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고 이클립스 멤버 류선재를 연기한 변우석을 떠올린다. 엄마의 손목에는 임영웅 굿즈인 파란 팔찌가 채워져 있고, 딸의 손목을 감고 있는 워치는 변우석이 화면에 자리 잡고 있다.


 영혼 없이 끌려온 아빠와 대조적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엄마가 상영관 안으로 입장하는 모습까지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마침 근처 백화점에서 변우석이 광고하는 뷰티 브랜드가 백화점 한정으로 그의 사진이 들어간 손거울을 증정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영문도 모르는 남편을 재촉해 백화점에서 살 것이 있다고 총총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백화점 조명보다 빛나는 손거울 (우측)


 언젠가 엄마의 결혼 전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흑백 사진 속 긴 생머리의 늘씬한 젊은 여성은 소위 나팔바지라고 불리던 멋들어진 부츠컷 팬츠를 입고 도도한 포즈로 앉아 있었다. 내가 몇 살 때 그 사진을 봤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엄마가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회사 다닐 때가 참 재미있던 시절이었다"라고 이야기하던 순간은 생생히 기억난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살림하고 아이 뒷바라지 하며 나에게는 '엄마'로만 존재하는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는 멋진 사람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여자'다. 엄마는 임영웅이 아들 같아서가 아니라 정말 좋아서 좋아하는 거다. 내가 변우석을 조카 보듯 우쭈쭈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멋지다고 느끼고 설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모녀는 각자의 최애 덕분에 핑크빛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중이다.


 "할머니는 '영웅이 형아'만 좋아한다"며 질투하는 손자를 꼬옥 안아주며 엄마는 설명해 준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건 우리 손자지만 "영웅이 형아는 할머니의 유일한 위안"이라고. 팍팍한 하루하루, 변우석과 함께 하며 숨 쉴 구멍을 찾는 딸은 그 말에 이제 진심으로 공감한다.


 엄마, 내가 지금의 엄마 나이가 될 때까지 변우석 팬으로 남아 있으면 그를 한 번이라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 우리 서로의 덕질을 응원하기로 해요!


엄마는 건행*! 나는 평통*!



* 건행 :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의 준말. 임영웅이 팬들의 건강을 신경 쓰며 건네는 인사.


* 평통 : "평생 통통이"의 준말. 통통이(변우석의 팬을 부르는 애칭)로 평생 살겠다는 변우석 팬들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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