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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직업을 동사로 표현한다면

한민용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 #서평단 리뷰

by 글쓰는하루

취준생 시절, 내가 응시한 수많은 면접 중에는 한 뉴스 전문 방송사의 아나운서 선발을 위한 것도 있었다. 요즘 '딕션이 좋다'라고 표현하는, 주어진 내용을 또랑또랑하게 읽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어서 필기 통과 후 신나게 방송사에 면접을 보러 갔었다.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가 잘못된 장소에 왔다는 걸 깨달았는데, 티비 화면에서 보던 화려한 아나운서들이 사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은 진짜 아나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처지의 지원자들이었는데, 오래전부터 전문 아카데미에서 준비해 온 듯 지원자 한 명 한 명이 이미 외모적으로 완성된 아나운서였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헤어며 의상을 체크해 주는 그녀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꼿꼿한 자세만큼이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저 단정하게 입고 온 나와는 차원이 달랐고, 분명 신경 써 정장을 입고 화장을 하고 왔건만 이제 막 헤어숍에서 나온 듯한 반짝이는 그녀들 옆에서 그저 한없이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내게 카메라 테스트 때 읽을 뉴스 원고가 주어졌다. 같은 원고를 받아 든 아나운서 같은 그녀들은 또 삼삼오오 모여 돌아가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멘트를 연습했다. 나는 한쪽 구석에 나처럼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나와 비슷하게 그저 단정하기만 한 지원자 옆에 자리를 잡고 원고를 읽으며 연습했지만 이미 너무 주눅이 들어 포기한 상태였다. 면접장 주변에는 그 아름다운 그녀들을 구경하러 온 방송사의 아저씨 직원들이 팔짱을 끼고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고 있어서 모멸감마저 들었다. 이런저런 압박감에 나는 짧은 원고도 완벽하게 읽지 못하고 중간에 발음을 틀려버렸고, 눈앞에서 카메라 옆에 서 있던 면접자인지 카메라맨인지가 혀를 끌끌 차는 걸 보고 말았다. 진지하게 아나운서를 꿈꿔본 적도 없고,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던 내가 요행을 바란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송사 면접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긴 채 씁쓸히 마무리되었다.


그 후로 내게 방송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쭉 그 화려한 미모의 여성들의 이미지와 겹쳐지곤 했다. 꼭 아나운서가 아니더라도, 예쁘고 늘씬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화면 앞에서 당당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연예인과 같은 이미지랄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평범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고, 한 방송사의 "최연소 여성 메인앵커"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가진 한민용 님이 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때의 나와 지원자들은 주어진 뉴스 원고만 읽었지만, 앵커라는 자리는 뉴스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책을 읽기 전 나는 한민용 앵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OTT 서비스가 자리를 잡으며 티비를 보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저녁 시간대에 자연스럽게 틀어놓았을 방송사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 자체를 안 본 지 오래다. 그래서 각 방송사의 간판 앵커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뉴스는 대부분 온라인이나 신문으로 접한다. 그녀를 몰랐어도 책 표지의 띠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수식어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여성 메인앵커 자체가 흔하지 않은데 거기다 최연소라니, 화려한 타이틀과 달리 '빨래골 여자아이'였고 동대문에서 판매 알바를 했다는 과거. 이것은 꿈과 희망을 주는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의 성공 스토리 아닌가. 중년의 나이에도 마음 한 구석에 성공하고 싶다는 꿈이 남아있는 입장에서는 당장 집어들 수밖에 없는 책이다.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가고 난 후의 마음은, 신기하게 따뜻하고 잔잔하다. 보통 이런 류의 성공기(?)를 읽으면 "그래 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지, 오늘부터 뽜이야!!"하고 새벽기상이든 루틴이든 따라 하겠다며 열정의 불길이 활활 솟는 법인데(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확 사그라드는데), 작가가 언론계에서 직업인으로 살아가게 된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과연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직업에 어떤 맘으로 임하고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고 싶어진다.


20여 년 전 그날, 잔뜩 움츠러져 있다가 똑 떨어진 나처럼 언론사 공채에서 수없이 떨어졌다는 한민용 앵커. 심지어 언론사 공채를 준비하기 위한 스터디 모임에서조차 떨어진 스토리까지 나온다. 이 스토리가 단순히 칠전팔기 끝에 원하는 언론사에 합격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면 여타의 자기 개발서와 차별점이 없었을 텐데 그녀는 우회 경로를 택한다. 모두가 목표로 하는 언론사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우선 입사해서 실전 훈련을 쌓은 것. 이대로 계속 떨어지다가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는 그녀의 고백이 참으로 깊이 와닿았다. 나 역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큰 사람인데, 실패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하루하루 위태롭게 버티고 있기에 이 부분에서 그녀의 대처가 매우 인상 깊었다.

그 후 이직을 거치며 지금의 앵커가 되기까지, 그리고 앵커가 된 후 대한민국의 크고 작은 역사의 현장을 누비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직업을 대하는 본인만의 태도가 매일 단단히 쌓였던 것일까.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자', '앵커'라는 명사 대신 '나는 00을 하는 사람'이라고 동사로 대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회사원이에요."라는 명사 외에, 회사의 이름 외에 나의 직업을 정의할 수 있는 동사는 과연 뭐가 될 수 있나. 동사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건 결국 회사에서 지시한 일이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이라도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20년 넘게 일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일이 어려운 나에게 그녀는 생각지 못한 따스한 위로와 응원을 건넨다. 화려해 보이는 메인앵커인 그녀도 첫 방송은 봐줄 수가 없었다고. 일단 시작한 후 노력하라고.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나뿐 아니라, 모든 걸 다 떼어낸 나 자체로서의 나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본다. 한민용 앵커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삶을 이끌어 줄 나만의 이름표를.

화려하고 차갑게 보이는 앵커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하지만 스스로를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 한민용 앵커는 이 책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설득하고 있다. "당신만은 꼭 당신의 편이 되어주라"라고.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이야기를 골라 스스로에게 들려주라"라고.


만삭의 배를 안고 뉴스 앵커석에 앉아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장면을 만들어 낸 한민용 앵커가 멋진 엄마로 복귀하길 기대해 본다.

[출판사 이야기장수로부터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았으며, 개인의 솔직한 생각을 담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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