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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18. 2023

다가오는 청룡의 해에는  날자, 날아보자꾸나

슬픈 마법사의 꿈,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 인기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워킹맘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보고 싶어 시청한 작품이었다. 매일 발을 동동 구르며 분주하게 살다가 결국 나를 잃어버리는 워킹맘이 등장하는데,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워킹맘 커뮤니티의 후기들을 보고는 궁금해서 안 볼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번아웃 증상을 느끼고 있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워킹맘,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울컥할 것 같은 마음을 간직한 채 위태롭게 회사와 가정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드라마를 보기도 전에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감정선을 딱 한 번만 건드려 다오, 바로 오열 스위치를 누를 테다' 하는 비장한 각오로 넷플릭스의 버튼을 눌렀다.


반드시 처음부터 볼 필요는 없다고 해서 워킹맘 사연이 나오는 회차부터 시청했다. 역시나 수많은 동지들의 증언대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을 노릇을 하며 하루종일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니는 '너무나 나 같은' 워킹맘의 사연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애쓰다가 가성치매 증상까지 보이며 몸도 마음도 부서져가는 그녀의 쓸쓸한 모습을 보자니 서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끅끅 울기도 하며 한바탕 한풀이를 제대로 했다.


하지만 공감이 가는 만큼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감동은 덜했다. 너무 익숙하고 잘 아는 맛이라, 아무리 맛있게 먹었어도 새롭지 않고 살짝 아쉬움이 남는 느낌.


실컷 눈물도 쏟고 가슴속 응어리도 어느 정도 풀렸겠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가슴 저미는 스토리를 만났다.



(여기서부터는 드라마 특정 인물의 결말이 포함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라마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높은 레벨의 마법사라는 망상에 빠져 사는 공시생 김서완. 공무원 시험에서 매번 커트라인에 걸려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좌절 가득한 현실 세계를 외면한 채 용을 물리치는 높은 공력의 마법사로 게임 속 세상에서 산다. 현실에서는 시험에 거듭 떨어지고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초라한 인생이지만, 망상 속에서의 그는 용에게 치명상을 입고 탑에 머물며 마력을 회복 중인 위대한 마법사다.  


이 드라마를 보던 시기에 나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별 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교재를 펴 보니 만만하게 볼 자격증이 아니었고,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이건만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었다. 게다가 책만 좀 펴보려고 하면 어찌나 잠이 쏟아지던지,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 범위 안의 내용을 모두 숙지하지도 못한 채 시험에 임했으니 붙을 리는 만무했고, 결과는 커트라인에서 딱 한 문제 모자란 낙방이었다.

아악! 한 문제만 더 맞혔어도!!!!

드라마 속 서완 역시 좁디좁은 고시원 방에서 청춘을 보내며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아깝게' 계속 떨어진다. 커트라인에 걸린 아까운 점수는 도전을 포기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는 족쇄이자, 다음 시험에 대한 희망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달콤한 유혹이다.


그저 있으면 도움 될 것 같아서 가벼운 맘으로 응시한 자격증 시험에 떨어져도 이렇게 분통이 터지는데,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응시한 시험도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지니 약이 바짝 올라 방방 뛸 지경인데, 본인의 인생을 걸고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가 매번 커트라인에 걸린 낙방이라니. 얼마나 좌절스럽고 안타깝고 미련이 많이 남을까. 얼마나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원망스럽게 느껴질까.


그가 스스로를 마법사로 칭하며 망상 속으로 빠져든 심정이 깊이 공감되었다. 나 역시 현실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얼마나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른 삶을 시작하고 싶다고 얼마나 마음속으로 외쳤던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며 가성치매 증상이 나타난 워킹맘보다도, 마법 세상에 숨어버린 공시생에게 더 공감이 갔던 이유다.


병이 호전될수록 김서완의 마법 세계는 희미해져 가고, 용과 대적하는 용맹한 마법사였던 그는 치료가 진전된 환자이자 공시생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치료는 이루어졌지만 완전한 회복을 하지 못한 그는 퇴원을 한 후에도 위태롭게만 보였고 예감했던 대로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떨어질 일만 남은 현실, 다른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 세상이 지긋지긋했을까. 그는 마지막으로 불을 뿜는 용들을 바라보며 헤아릴 수 없는 땀과 눈물을 바친 고시 학원 건물에서 몸을 던진다. 그는 과연 날아오른 것인가 추락한 것인가. 정녕 그가 날개를 펼칠 수 있는 다른 세상은 없었을까.



드라마 속 인물의 아픔에 빠져들었던 먹먹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용이 다가오고 있다. 김서완을 찾아온 용들은 불을 뿜으며 그를 위협했지만, 내게 오고 있는 청룡들은 '새해'라는 근사한 이름을 달고 미소 짓고 있다. 그들이 내게 우호적 일지, 크나큰 시련을 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저 지금은 그 유명한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을 읊조려 볼 뿐.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타이틀 사진 : Unsplash의 Tim Mossholder

* 본문 사진 :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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