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은 출근할 때 늘 지나는 곳이다. 가끔 녹사평까지만 가기도 하지만, 녹사평도 범 이태원이니까. 상수, 합정, 망원까지 범 홍대인 것처럼. 그러니까 늘 지나가기만 한다. 나에게 이태원은 여전히 낯설고, 잘 모르겠고, 살짝 무섭기도 한 공간이다. 한광이가 이태원 살았던 시절, 새벽까지 놀다가 나와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길바닥에 외국인들이 죽 늘어 앉아서 병맥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 여기 이태원이지'했던 기억이 있다.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던 게 거리엔 사람이 매우 많았고, 그들은 그냥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태국의 카오산 로드에서 비슷한 풍경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도 어디선가 그런 식으로 술을 마셔본 기억도 있다. 무서운 건, 그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이태원 == 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태원의 술은 조금 다른 것 같아서, 내가 생각하는 술은 낯선이와 마시는 게 아니라서, 이태원에서 술을 마셔본 기억은 매우 드물다. 술은 익숙한 사람 혹은 익숙한 공간에서 마시는 게 좋은 것 같다. 나는 쉬이 쓰러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홍대와 이태원 사이로 이사를 왔을 때, 몇몇 사람들이 그럼 이제 이태원에서 노나요? 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태원에서 놀고 싶으니까 그렇게 물었겠지? 거기서 뭐하고 노는지 저는 잘 몰라서...
저는 망원, 합정, 상수가 더 좋습니다. 홍대입구도 잘 안 가게 된다. 어제는 김밥레코즈에 매우 오랜만에 갔는데, 너무 외딴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상상마당에서 <이태원>을 보고 김레를 향해 걸었는데, 토요일이라 사람은 엄청 많고, 가도가도 김레는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김레에서 CD를 사고 다시 만두를 먹으러 다시 망원동을 향해 걸었는데, 망원동도 가도가도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김레 - 룰랄 - 유어마인드가 거의 일직선으로 있어서 이렇게 다니는 재미가 있었는데, 유어마인드도 이사를 하고, 한잔의 룰루랄라도 없어져서 이제 김레는 김레를 위해서만 가야 한다. 김레 화이팅. 그 자리를 오래오래 지키시길 바라나, 혹시라도 이사를 하게 되시면 6호선 쪽으로 와주세요.
영화는 정말 좋았다. 특별히 이태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노년에 대해 생각했다. 노년의 삶이 나에게도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노년을 맞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삼숙 님을 보면서, 안국역에 있는 카페이드라의 주인장 분이 생각났고, 공덕역에 있는 처갓집양념통닭 주인 내외 분들이 생각났다. 노년에도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들. 과거의 영광을 계속해서 유지해 오고 있는 사람들. 아마 그 분들도 미래를 이렇게 까지 내다보고 자리를 잡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내다보고 잡으셨다면 존경심이 두 배가 될 것 같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트위터에 만연한 패배주의를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트윗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젊은 사람들이 살기에 좋지는 않고, 노력한다고 해서 결과가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 보장되지 않는데, 비슷한 또래의 다른 누군가는 부모 덕에 큰 노력 없이 성취를 이루는 것을 보면서, 어차피 안 될 것 하지 말자는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고 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당연한 말이지.' 하면서 그 때는 그냥 넘겼다.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그 트윗이 생각났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실 나는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삶을 살기까지 운이 계속해서 너무 좋았어서, 앞으로도 운이 계속 따라주지 않을까, 같은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이번 주엔 정말 로또가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말이다. 그리고 내 삶에서 부족한 것들에 대해선 이 정도면 되었지, 하면서 넘기거나 남탓 혹은 자본주의 탓을 한다. (자본주의 탓을 가장 많이 한다.) 지금 정도의 지위에서(높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낮지도 않다.) 내집이 없는 건, 망할 자본주의 안에서, 그 중에서도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더 생각하지 않는다. 더 깊게 생각한다고 자본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 주말에 무슨 영화를 볼까 같은 눈 앞의 재미만을 좇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내 삶에 대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같이 사는 사람과 고양이의 미래까지도 조금 더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주말마다 보던 영화를 안 보진 않겠지만, 적어도 태도는 달리하게 될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쌓아둔 것을 파먹고 사는 삶은 곧 끝날 테니까. 나도 70대 후반에 꾸준히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요즘 주변에서 부동산 얘기를 엄청 많이 듣는다. 그래서 그런지 삼숙 님의 파워를 부동산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랜드올오프리 앞 건물이 50억에 팔렸을 때, 삼숙 님은 담담해 보였다. 삼숙 님은 100억을 줘도 절대 팔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자본으로써의 부동산이 아니라, 자존심으로써의 부동산, 나도 그런 부동산 을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