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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즈 Nov 09. 2024

마왕과 어머니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이었던 순간의 기억

서교동의 어느 집 앞. 일곱 명의 남자가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부저음이 울리며 철문이 열렸고 우리는 순서대로 대문을 넘었다. 외할아버지, 네 분의 외삼촌과 이모부, 그리고 나. 어릴 때 자주 뛰놀던 정원 너머 계단 위. 새 할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내려다보셨다. 계단 폭이 넓지 않았기에 우리는 일렬로 현관을 향해 올랐다. 수용소로 줄지어 들어가는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계단을 오르던 중, 차고가 보였다. 검은색 중형차. 그 옆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어쩌면.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새벽 2시경이었다. 왠지 바깥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 조용한 집안 여기저기에는 빨간딱지가 붙어있었다. 현관에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문이 왜 열려 있지?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맨발로 뛰쳐나가야 했다. 어머니가 끌려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영화처럼 멋지게 적을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때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어머니를 계속 끌고 갔고, 다른 남자 둘이 나를 제압했다. 복부와 등을 가격 당한 것만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내가 한심했다. 둘러싸고 구타할 줄 알았지만, 그저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나약하면 무시당할 뿐이야. 어머니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왜 나쁜 놈들은 항상 검은색 옷을 입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 댔다. 사람 살려나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를 힘껏 외쳤다. 나는 무력했다. 누군가에게 밟혀 꿈틀거리는 지렁이조차 못 되는 것 같았다.

새 할머니는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당연히 서재로 갈 줄 알았는데... 하긴 이 인원이 들어가기에는 좁겠지. 마왕은 2층 거실에 앉아 있었다. 입에 파이프 담배를 문 채. 삼촌들과 외할아버지가 차례로 앉았다. 나는 막내 삼촌 옆에 자리했다. 어쩌면 외할아버지가 마왕과 악수라도 하며 인사를 나누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사돈 사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모두 굳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다들 몰려오셨소. 저 아이는 왜 데리고 온 것이오.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답했다. 이 아이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됩니다. 금방 어른이 되겠지요. 마왕이 나를 응시했다. 목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 딸이 병원에 있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계속 혼수상태라는 것도요.

종종 생각한다. 동생에게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날 밤도 그랬다. 같이 잠을 자던 동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 문을 두드리며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정신없이 손잡이를 계속 흔들기만 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머니를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문을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주먹질 발길질을 하다가 식탁 의자까지 집어던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문이 열렸다.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계속 잠을 잘 수 있다고? 동생이 어머니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에 소주병과 정체불명의 알약이 잔뜩 있었다. 무슨 약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19에 전화부터 하고 숨을 확인했다. 어디선가 본 심폐 소생술도 흉내 내보고 어머니의 정신이 들게 하려고 따귀도 때렸다. 여전히 의식이 없던 어머니는 구급 대원들이 온 뒤에야 의식을 차렸다.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보호자 한 분만 같이 갑시다. 동생을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가장이고 보호자였으니까.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며 집을 나서는데 부서진 안방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내 주먹에 통증이 느껴졌다. 응급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구나. 이 불효자 놈아.

"며느리가 병원에 있는데, 한번 와 보시기는 했습니까?”


삼촌이 물었다. 공격적인 말투였다. 모두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마왕 혼자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화를 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삼촌들은 공격적으로 여러 질문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마왕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의 한마디는 모두의 분노를 한층 더 키웠다. 내 돈을 노리고 죽는시늉하는 사람들이 한 둘인 줄 압니까? 삼촌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항상 점잖은 모습을 보이던 가까운 어른들이 험한 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더욱 흐려졌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에 가서 위 세척을 하고 몇 가지 응급 처치를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보호자를 찾길래 내가 보호자라고 말했다. 의사는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동의서가 필요한데 미성년자는 안된다며, 혹시 가까운 어른이 없냐고 물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없다고, 내가 보호자라고, 내가 서명하겠다고 했지만, 안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럼 이대로 죽게 놔둘 거냐며 의사의 멱살을 쥐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결국 경비원에게 제지당했다. 이 새끼들 어머니가 잘못되면 다 죽여 버릴 거야 라며 또다시 무력한 외침을 토해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것일까? 모르는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 기도해. 하느님이 살려 주실 거야. 내가 평생 동안 종교를 갖지 않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상황에 기도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심했다. 공중전화로 외할아버지 집에 전화했다. 새벽인데 전화를 받으실까? 휴대폰이 없던 시대였다. 연결음을 들으며 수없이 욕을 하던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구미에서 오시려면 3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지금 오고 계세요. 의사 선생님.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오시면 바로 동의서 쓰시게 할 테니 일단 먼저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어머니 죽습니다.

분노한 삼촌이 마왕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외할아버지가 이를 저지했다. 제가 알기로 그 빚은 김 서방의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아들 문제를 이렇게 나 몰라라 하실 겁니까? 빚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외할아버지는 차분히 이야기했다. 씩씩거리던 삼촌들의 흥분도 많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분위기와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마왕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질문했다. 그래서 왜 오신 겁니까?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당신의 장손인 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말에 마왕이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을 했다.


“나한테 돈 뜯어내라고 너네 엄마가 시키더냐? 참 별별 쇼를 다 하는구나.”


마왕의 회사 사무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머니는 며칠 째 혼수상태였고, 병원비와 수술비는 외할아버지가 부담했다. 하지만 큰외삼촌의 부도로 인해 외가 친척들의 경제적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문제는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도 따위나 하며 신에게 의지해 시간을 죽이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 가족이고 가장은 나니까. 병원비는 중학생이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큰돈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 경제적 여유가 있고, 적어도 나만은 특별히 아낀다는 사람. 그래도 장손이니까. 그렇게 생전 처음 마왕의 회사를 찾아간 상황이었다. 입원비 만이라도 도와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쇼라고? 돈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달려들어 뜯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돌아가고 나서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람에게 병원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내 앞에서만 센 척하고 입금해주시지 않을까? 감정을 앞세웠다가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돈을 가진 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이 얼마나 비굴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쇼라고?”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어질어질했다. 이게 뭐지? 여기가 현실인가? 그 이야기를 왜 또 다 같이 듣고 있는 거지? 고함 소리 탓인지 마왕의 사용인 몇 명이 계단으로 올라왔다. 외할아버지가 중재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겠군요. 다시는 뵐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이즈야. 외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쳤다. 너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 누구도 믿지 못하신다고 하더라도 저 하나만은 믿어주십시오. 돈을 그냥 달라고는 안 하겠습니다. 빌려주세요. 제 인생을 담보로 평생 동안 갚겠습니다. 노예가 되어도 좋고 시키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부디 어머니만 살려주세요.”

말이 끝나는 순간, 주변 어른들이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계속 차분하던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후 마치 물결에 휩싸이듯 정신없이 대문 밖까지 끌려 나왔다. 외할아버지와 삼촌들이 나를 둘러싸며 미안하다고 했다.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른들의 분노가 순식간에 처참한 마음으로 변했다. 내가 잘못한 걸까? 마왕은 처음과는 달리 현관문 앞까지 나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그날을 회상했다. 네 말 한마디에 커다란 남자들 예닐곱이 울지 않았냐. 그렇게나 어린것이. 넌 참 대단한 놈이야. 그냥 웃고 말았지만 정작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왜 눈물을 터뜨린 걸까? 그 직전까지의 분노는 어디로 간 걸까? 이때부터 나는 돈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을 경계하게 되었고,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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