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들어가 ‘버킷리스트 100’이라는 폴더를 클릭했다. 글 쓰기를 누르고 제목을 입력했다. “29번 버킷 포기 - 50명에게 거절”. 그리고 포스팅을 시작했다. 29번 버킷 리스트는 ‘소개팅하기’였다. 평생 단 한 번도 미팅이나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시절에는 그나마 단체 미팅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일하는 시간과 겹치기도 했고, 연애보다 공부 시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장학금을 놓치는 순간 나의 대학 생활은 끝이 날 테니까.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미팅 같은 단체 활동이었다. 이런 치열한 삶 속에서 소개팅 같은 제안이 들어올 리도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회사에서 나를 뽑은 이유 중 하나가 연애 경험이었다. 미팅이나 소개팅은 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연애는 지속되었는데, 면접에서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첫 직장에서의 직업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였고 이 회사는 연애 게임으로 유명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의 회의 시간, 팀장님은 소개팅 장면의 감정선이 부족함을 지적했다. 그야 당연했다. 나는 경험이 없었으니까. 팀장님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팅도 소개팅도 한 번도 못해봤다고? 여태껏 뭐 하고 살아온 거야?” 이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영상이나 소설을 참고했지만, 결국 소개팅 장면은 삭제되었다. 나의 경험 부족 탓이라는 생각에 괴로웠고, 그때부터 소개팅 하기는 버킷 리스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회사는 연애 시뮬레이션이 주력인 곳이었다.
그리 절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쉼 없는 연애를 하게 되었으니까. 연인이 있는 상황에서 소개팅을 할 필요는 없으니 생각이 멀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여러 번의 연애를 경험한 끝에 한 사람과 5년이 넘는 긴 연애를 했다. 이별 후 지친 마음에 한동안 연애를 멈춰 보기로 했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며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솔로 생활을 1년쯤 즐겼을 무렵, 문득 버킷 리스트가 떠올랐다. 지금 이 시간이 유일하게 소개팅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염치 불구하고 주변에 요청을 돌렸다. 부탁한 49명이 모두 곤란하다고 했다. 당연하지. 나를 소개해서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예상한 바였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소개팅 업체라고 했다. 소개팅도 업체가 있나요?라는 말에 결혼 정보 회사보다 가벼운 만남을 주선하는 곳이라며 한번 상담하러 오라고 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저희 회원 분 추천이세요. 추천인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소개팅해달라며 여기저기 참 찌질하게 말하고 다녔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부끄러워졌다.
홍대에 위치한 소개팅 업체는 의외로 깔끔한 사무실이었다. 회사 로고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어 약간 놀라웠다. 소개팅 업체라는 게 정말 있는 거였구나. 상담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매니저는 언젠가부터 곤란하다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회원 기준에 맞지 않으세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모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49명이나 소개팅을 못해준 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겠지. 나의 키, 외모, 경제적인 상황, 이전 연인들과의 교제 기간과 형태까지 모든 것이 문제였다.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면서 만나실 타입은 아니신 것 같아서요.” 그 한 마디가 그나마 감사했다. 적어도 정직한 사람으로는 보였구나.
소개팅 버킷을 포기하며 1년간의 솔로 생활을 멈추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또 다른 연애가 시작되었다. 다시 몇 사람이 지나갔고 그중 마지막 사람에게 크게 상처받는 말을 들었다. 이전에 겪은 연애와 달리 트라우마까지 남게 되었다. 이제 연애는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한동안 일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회사도 퇴사하게 된 상태였다. 방치했던 버킷 리스트나 채우며 힐링해볼까 싶어 오랜만에 블로그의 버킷 리스트 폴더를 클릭했다. 리스트를 훑어가던 중 문득 소개팅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가로 줄로 그어져 있고 [포기]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반발심이었을까? 아니면 본능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인터넷에 소개팅을 검색했다. 그리고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우연히 발견한 기사는 책 소개팅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 책으로 하는 소개팅. 서로의 인생책을 나누며 알아간다는 콘셉트가 마음에 들었다. 기사를 보자마자 링크를 타고 가서 참가 신청을 했다. 지금 당장 해야만 했다. 이번 회차가 마지막이라는 공지 때문이기도 했고, 나이 제한의 상한선에 걸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나의 버킷 리스트에 영원히 [포기] 딱지를 뗄 수 없겠지. 인연을 만나는 것보다는 소개팅 자체가 목적이라면 이상할 수 있겠지만, 상관없다. 의외로 재미있을 지도 모르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나? 날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솔로’를 정주행 했다.
소개팅을 앞둔 사람의 훌륭한 선택. 나는 솔로 정주행.
책 소개팅을 하는 장소는 독립 서점이었다. 입구에서 호스트가 맞이하며 천으로 된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에 가져온 책을 넣으세요. 책을 넣고 들어가니 넓은 테이블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엽서가 하나 놓여 있다. 가져온 책 제목과 추천사를 적어달라고 한다. 간단히 작성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남자들이 하나 둘 모인다. 키가 큰 한 남자는 오디가 커피를 자기 몸에 쏟았다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하하 웃는다. 넉살 좋은 사람이다. 훈훈하게 잘 생긴 남자들도 있다. 인기가 좋을 것 같네. 잠시 후 여성 분들도 하나 둘 들어온다. 맞은편 안경 쓴 여성 분이 엽서에 책 제목을 쓰는데 언뜻 글자가 보여서 얼른 눈을 돌렸다. 규칙은 지켜야지. 그런데 글자 수가 세 글자이던가? 네 글자이던가?
남자 다섯, 여자 다섯으로 총 열 명의 멤버가 모이고 나서 본격적인 책 소개팅이 시작되었다. 인원이 5:5면 소개팅이 아닌 미팅 아닌가? 하지만 타이틀이 소개팅이니 버킷 리스트에 달성으로 등록해도 상관없겠지? 집에 가면 블로그에 [포기]를 지워야지. 같은 생각을 하며 호스트의 러브 스토리를 들었다. 두 분도 오래전에 다른 지역에서 책 소개팅을 통해서 만났다고 한다. 그 독립 서점이 없어지게 되어 아쉬운 마음에 이런 행사를 직접 운영해 보게 되었다고. 음. 좋은 스토리 텔링이다.
자기 소개 부터!
시작은 자기소개부터. 커피남은 남자들끼리 있을 때 했던 멘트를 똑같이 한 번 더 했다. 오다가 커피를 제 몸에 쏟았지 뭡니까. 좋은 인연을 만나려나 봐요. 하하하. 아까는 연습이었구나.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다른 남자들의 자기소개는 그리 인상 깊게 남지 않았다. 다만, 다들 잘 생기고 괜찮아 보여서 망했다는 생각만 남았다. 딩동~ 오늘의 봄버맨은 마이즈입니다. 기왕이면 봄버맨보다 마이트 봄잭이 더 좋은데. 요즘 사람은 마이티 봄잭을 모른다니까. 키가 큰 여성 분이 자기보다 작은 남자는 싫다고 했다. 자기소개에서부터 이상형을 말하는 건 반칙 아닙니까? 하지만 가능성을 제외하게 해 준 것에서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저는 탈락입니다. 안경을 낀 여성 분은 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구 여자 친구와 비슷한 일을 한다고 했다. 집도 근처였다. 그분에게는 죄송하지만 괜히 불편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저분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까 책 제목을 언뜻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분명히 서너 글자 정도였지. 가장 화려하게 꾸미고 온 분은 사업을 한다고 했다. 경제적 자유 이야기를 하셔서 불편했다. 고백하자면 초면에 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돈이나 물질적인 부분이 자신의 인생관에 깊이 박힌 사람도 마찬가지. 다른 한 분은 치위생사라고 소개했다. 치과의 드릴 소리와 소독약 냄새가 상상되었다. 마지막 한 분은 심리 연구원이라고 한다. 유일하게 관심사가 잘 맞는 분인 것 같지만 왠지 눈이 저 하늘 끝에 높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결국 오늘은 그냥 재미있는 경험으로 남기고 돌아가야겠네. 어라? 나 의외로 까다로운 취향이었나?
폭탄을 생성하는 봄버맨 vs 폭탄을 수거하는 봄잭
호스트가 미리 설치해 둔 랜덤 코스터로 자리 교체가 한번 이루어지고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팀을 이루어 간단한 보드 게임을 진행했다. 보드 게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지만, 피자판 위에 야채 컴포넌트를 얹는 단순 피지컬 게임이었다. 수전증이 있는 나에게는 최악의 게임. 파트너는 화려하게 꾸미고 온 사업한다는 분이셨다. 불편한 사람과 파트너가 된 데다가 수전증까지 있다 보니 게임을 잘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른 팀에서 자폭을 여러 번 해준 덕분에 중간 정도의 순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게임이었다. 정확히 이 게임은 아니지만...
다음 단계는 드디어 책 소개팅의 핵심인 책 고르기 단계. 이성이 가져온 다섯 권의 책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호스트가 책을 한 권씩 소개했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각자 쓴 엽서를 읽어 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 책들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모임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고르는 순서는 앞서했던 보드게임의 순위였다. 내가 보드게임을 못하는 바람에 때문에 3위가 된 파트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를 수 있었던 남은 세 권의 책.
내가 고를 차례는 3번째. 이미 앞에 두 사람이 책을 골라갔고 나의 선택권은 세 권 중 하나였다. 내게 무해한 사람, 마흔에 읽는 니체, 모든 요일의 여행. 누가 무슨 책을 가지고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일지도. 아무튼, 고민 끝에 마흔에 읽는 니체를 선택했다. 최근에 나갔던 독서 모임에서 철학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함을 느꼈기 때문에 철학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시기였다. 여자들의 책이 모두 선택되고 나서 드디어 남자들의 책이 공개되었다. 누가 가져왔을지 모를 책을 선택하는 것보다 내가 가져온 책을 누가 선택할지가 더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가져온 인생책은 뭐였냐고?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지?’
책 소개팅의 준비물. 그중 핵심은 ‘나의 인생 책’이다. 인생책들을 두고 고민했다. ‘은하영웅전설’. 1권만 가져가서 외전을 포함하면 총 14권입니다. 정말 명작이니 꼭 읽어보세요.라고 하면 부담스럽겠지? ‘나도 게임을 만들고 싶어’. 이 책을 읽고 제가 게임 개발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해봤자 이 직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선택할 리 없는 책이 아닌가. 읽기 싫거나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게 하는 것도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에 꽂힌 나의 인생책들은 대부분 게임 관련 책이거나 장편 소설이었다. 소개팅의 주제 특성상 진짜 인생 책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어떤 것을 가져가더라도 부담스럽거나 불편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 킹이나 러브 크래프트도 싫어하겠지? 팀 버튼 책은 그래도 괜찮을까? 그렇게 책장을 노려보던 중 구석에 매우 적절한 책이 눈에 띄었다. 얇아서 읽기에 부담되지 않고 소재도 적당히 괜찮다. 유일한 단점은 독립출판물이라는 정도지만, 무엇보다 나의 인생책이라고 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 모임이 아닌 책 소개팅이니까. 스토리텔링을 활용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나의 인생 책으로 가져간 것은 '혼자 다른 생각 했어요' 였다.
호스트가 내 책을 들고 소개했다. 주인공이 제주도까지 혼자 걸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 소설이라고 합니다. 독립 출판물이지만, 이 책을 추천하신 분에게는 특별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라고 하네요. 내 책을 선택한 사람은 심리 연구원이었다. 어차피 이 다섯 분들 중에 나를 좋게 볼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 기왕이면 책을 읽고 나누는 대화가 즐거운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점에서 보면 최적의 상대였기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나 역시 심리학을 좋아하니까. 게임 기획의 근간은 심리학에 있으니까. 모든 책이 선택되고 난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어떤 책을 가져왔는지를 밝히고 인생 책인 이유를 소개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저는 도보 여행을 소재로 한 단편 소설을 가져왔습니다. 이 소설에서 제주도까지 걸어간 사람. 그 사람이 접니다. 그 책은 제가 쓴 책이고 자전적 소설이지요. 저에게 있어 그 여행이 특별했기 때문에 인생 책이기도 하고 이 책을 계기로 작가로서 자신감을 얻고 다양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기에 인생 책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재수 없다고 생각하며 멘트를 내뱉었다. 나르시시스트처럼 보이려나? 뭐 어때. 평생 단 하루뿐인 소개팅일 텐데, 즐겨보자고! 내가 고른 철학 책의 주인은 치위생사였다.
책 소개팅은 이후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책을 돌려주고,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고른 책을 다 읽으면 그 책의 주인을 만난다. 내가 가져온 책을 선택하신 분 역시 다 읽고 나면 연락을 주시겠지. 반납형 만남(?)을 통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데이트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방식인 셈이다. 그 과정에서 책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된다. 호스트의 설명에 의하면 너무 만나기 싫을 때는 택배를 통해 책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책을 훑어보고 있는 심리 연구원 여성분을 보며 왠지 불안해졌다.
불안이가 스물스물... 나도 택배로 받게 되는건 아니겠지?
이제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갖는다. 그 사이 단 한 사람의 이성에게 익명으로 쪽지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남자 참가자들이 모두 괜찮았기 때문에 쪽지를 보내서 뭐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쪽지를 보내도 다른 사람이 보낸 것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텐데. 그래도 시스템인데 안 보낼 수도 없고… 심리 연구원 여성분에게 ‘책은 꼭 만나서 돌려주세요.’라고 보낼까? 아니, 너무 찌질해 보이지 않나. 고민하던 중 호스트가 1분 남았다며 재촉했고, 무난하게 보드게임을 같이 했던 분에게 ‘보드게임에서 실수를 많이 해서 죄송했습니다.’라고 보냈다. 나에게 쪽지를 보낼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이후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유유 카드를 술 대신 가위 바위 보로 대체해서 진행했다.
2부는 간단한 레크리에이션 질문카드를 사용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의도는 책을 가져간 사람이나 책을 고른 사람. 즉 앞으로 만날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호감을 확인하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질문과 호명이 인기 있는 남자, 인기 있는 여자에게 몰렸다. 이거 왜 하는 걸까? 인기도 확인하고 자기 위치를 확인하라는 걸까? 나에게도 하나의 질문 카드가 들어왔다. 여기 있는 이성 중에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이성은 누구인가요? 부모님이라는 말이 어색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로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이성은 심리 연구원,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이성은 사업하는 분으로 발언했다. 어머니는 같이 놀러 다닐 수 있는 며느리를 좋아하시고, 아버지는 현명하고 참한 며느리를 좋아하실 것 같았다. 그 이유까지는 묻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진행되어 애매한 분위기로 넘어갔다. 덕분에 다큐가 아닌 예능이 되었다. 호스트의 진행력이 이런 걸까? 진중하기보다 즐겁고 가벼운 모임으로.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진지한 이야기는 따로 해도 충분하니까.
뭣? 나에게 익명 쪽지가 왔다고? 그럴리가!
모임이 종료된 이후 호스트는 참가자들에게 2차를 강력히 권고한다고 말했다. 2차는 패스하고 그냥 돌아갈까 싶어서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익명 쪽지가 와 있었다. [궁금해요!] 어라? 아까 쉬는 시간에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당연히 아무 쪽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다섯 여성 중 적어도 한 분은 나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야레야레 이거 참. 2차를 가야겠네.
맥주 집에서의 2차는 여러모로 아쉬운 시간이었다.
근처에 살고 있다는 훈남 참가자가 안내해 준 가까운 맥주집으로 이동했다. 남자 둘, 여자 둘은 가고 남자 셋, 여자 셋이 남았다. 옛날 시트콤 제목 같았다. 맥주집에서 내 옆자리에는 키작남은 싫다고 하셨던 여성 분이 앉았고 심리 연구원이 맞은편 자리, 안경 쓴 여성 분이 사이드 자리를 차지했다. 가게가 시끄러운 탓에 바로 옆 사람과만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했다. 섞인 대화가 거의 없다 보니 커플 세 쌍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옆자리에 계신 분은 내가 작가라는 사실에 관심이 동했는지 여러 질문을 적극적으로 해주셨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나에게는 NPC로 느껴질 뿐이었다. 첫 소개 때 키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였다. 어차피 키가 작은 나와는 평생 엮일 일이 없는 분일 테니까. 다른 한 분은 구 여친과 비슷한 부분들 탓에 처음부터 불편했고, 나머지 한 분은 내 책을 선택한 심리 연구원이었다. 이 분은 조만간 따로 만날 상대였기에 이 자리에서 대화를 많이 나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효율적이니까. 게다가 각자 자기 옆자리 이성과 신나게 대화를 하고 있으니 끼어들기도 애매했다. 2차 괜히 왔나. 이 세명 중에 나한테 익명 쪽지를 보낸 분이 안 계신 건가? 어디선가 데프콘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데프콘이 보고 있다면 어떤 리액션을 했을까?
집에 도착한 뒤, 단톡 방을 열어 참가자 리스트를 클릭했다. 그중 내 책을 가져간 심리 연구원님을 터치했다. 잘 도착하셨냐는 인사와 함께 책 재미있게 읽고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늦은 시각이기는 했지만 조금 전까지 같이 있다가 헤어졌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치위생사 분에게도 메시지를 남겨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책을 읽고 먼저 연락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그만두자고 판단했다. 일찍 가신 분이므로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씻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집에 가는 전철에서 이미 다 읽었다며 내일 다시 연락하자는 내용이었다. 내 책은 어땠나요? 내 소설은… 내 이야기는 어땠나요? 심리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었나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참았다. 너무 늦은 시각이기도 하고, 며칠 뒤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하루만에 다 읽었다니. 무한한 감사를 하게 되었다.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오늘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생애 첫 소개팅.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개팅. 좋은 시간이었다. 계속 뒤척였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무언가 빼먹은 기분이었다. 결국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흔에 읽는 니체’를 읽기 시작했다. 읽히지 않는 책을 억지로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넣던 중 해야 할 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아! 버킷 리스트 수정 해야지!”
PC를 켜고 블로그에 들어가 ‘버킷리스트 100’이라는 폴더를 클릭했다. [29. 소개팅하기 – 포기]라고 쓰여있는 곳으로 커서를 움직였다. 오늘 날짜를 적고 ‘포기’를 ‘완료’라는 단어로 바꿔 썼다. 어쩌면 나는 책을 교환한 두 사람 중 하나와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눈이 높아 보이는 심리 연구원, 치과 향이 느껴지는 치위생사. 어쩌면 둘 중 누구와도 연애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오늘이 많이 아쉽지는 않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버킷 리스트를 달성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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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휴대폰에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왔다. 이 시각에 뭐지? 싶어서 무심하게 DM창을 열었다. 내용을 읽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소개팅 한번 하기 힘들었는데, 막상 하고 나니까 더한 게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