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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즈 Nov 16. 2024

요구르트와 콩자반

10대 시절, 나만의 비밀스런 케렌시아

중학교 2학년 때, 안양으로 이사 가면서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전학 첫날 일진들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온갖 심한 일을 당하면서 생겨난 나름의 생존 전략은 센 척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마이너 했던 ‘카멜레온’이라는 만화가 나의 교과서였다. 힘은 약하고 싸움을 못하더라도 허세와 만용으로 제압할 수 있음을 배웠고, 그 이후부터 죽일 생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었다.

카멜레온. 중학교때 왕따를 당하던작고 약한 주인공이 허세로 짱이 되는 이야기.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가방에 칼을 들고 다녔다.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대부분 다른 의도로 인지했다. 한 친구가 근처 공업 고등학교에서 구타당하고 돌아오는 일이 생기자 일진 그룹에서는 나에게 복수를 제안했다. 집이 가깝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모두가 학교 폭력물을 영웅시하는 시기였다. 결국 등을 떠밀려 공고 앞에 내려야만 했다. 또다시 왕따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그들은 응원을 표현했지만 나에게는 강요로 들렸다. 칼을 소매에 감춘 채 공고 뒷문으로 향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억지로 센 척을 하고 있을 뿐,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뒷문에는 학생 몇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담배라니... 역시 싸움 1위 학교는 다르구나. 이제 저들에게 말을 걸면 된다. ‘야! 2학년 XXX 나오라고 해!’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지만, 그들이 나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씨X 새끼야, 뭘 야려?”


하나가 말하자 그 주변에 몇이 나를 쳐다봤다. 황급히 시선을 깔고 몸을 돌렸다. 이대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다시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쳐들어가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전자를 택했다. 놈들이 따라올까 봐 얼른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고 그 앞에 있던 서점으로 들어갔다. 아무 책이나 잡고 읽는 척을 하며 유리문 밖으로 누가 지나가는지 확인했다.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심하고 나니 스스로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창피한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평생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야지.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단 높은 카운터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그 분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부끄러움을 직면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정면으로 돌파하던가, 딴 청을 피우던가. 나는 후자였다. 마치 책을 사러 온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으니까.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는 헌책방이라는 것을. 일반 서점처럼 책이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기보다 바닥에 쌓여 있었다. 제대로 분류되어 있지도 않았고, 노끈에 묶여 있는 것도 많았다. 흥미가 생겨 책의 무덤을 탐험했다. 놀랍게도 엑스맨 해적판이 눈에 띄었다. 아니, 이게 있다고? 노다지를 찾은 기분으로 오래된 만화책을 몇 권 골랐다.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들이 눈에 띄었지만, 가격이 걱정되어서 조용히 내려두었다.


“얼마예요?”

“400원.”

“네? 한 권에요?”

“네 권. 400원.”

“한 권에 100원이에요?”


미친 가격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헌책방이라지만 만화책 한 권이 100원이라고? 여기에서 100원에 사서 되팔이라도 하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려두었던 만화책을 다시 집어 들고 10권을 채웠다.


“이러면 1000원이죠?”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에게 1000원 지폐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지폐를 받는 노인에게는 양손이 없었다. 오른팔은 팔꿈치까지만, 왼팔은 손목 근처에서 멈춰 있었다.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 지폐를 끼워 넣는 모습은 기괴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돈을 지불했다. 이 와중에 내가 산 책은 하필이면 엑스맨이었다. 이상한 의미로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 이후 노인의 팔이 자꾸 떠올랐다. 처음에 느껴진 불편함은 언젠가부터 호기심이 되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걸까? 그 상태로 서점을 개업하신 걸까? 노끈은 어떻게 묶지? 식사는? 화장실은? 지폐가 아닌 동전을 드렸다면 어떻게 받았을까? 호기심이 극에 달할 무렵, 다시 한번 그 서점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무서운 공고 뒤편이지만 골목으로 잘 통해서 가면 들키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호기심이 공포를 이겼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서점을 보며 꿈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점 안은 백열전구의 불빛으로 묘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그 뭐더라. 무덤! 마치 책들의 무덤 같았다. 한 단위에 있는 카운터는 비어 있었다. 노인이 없는 빈 카운터를 살펴봤다. 책 보다 노인이 더 궁금했다. 방석이 하나 깔려 있고 그 옆 협 탁에는 플라스틱과 금속이 섞인 막대 같은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의수였다. 손가락이 있는 형태가 아니라 집게와 날카로운 막대가 달려 있는 구조였다. 탁자 위에는 돈 통이 있었는데, 지폐와 동전이 뒤섞여 있었다. 돈 통 옆에는 시선을 강탈하는 놀라운 물건이 있었다. 요구르트였다. 그 옆에는 연필꽂이에 비닐이 벗겨진 빨대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웬 요구르트지? 손자 손녀라도 오는 건가? 카운터를 둘러보던 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뒤에 노인이 서 있었다. 어라? 문은 열리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책방 안에 있었다면 들어올 때 분명히 보였을 것이다. 워낙 좁은 공간이니까. 이 사람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유령인가? 귀신인가? 마법사인가? 그날도 만화책 몇 권을 사서 돌아갔다. 기생수를 사고 싶었지만, 나의 선택은 도라에몽이었다.

이후 헌 책방은 나의 케렌시아가 되었다. 무엇보다 위치가 절묘했는데, 집에서 시내로 걸어가는 중간쯤이었다. 당시의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매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연히 대부분의 일자리는 시내에 있었다. 더운 여름에는 길을 걷다가 땀을 식히기 위해 헌 책방에 들렀다. 에어컨은 없었지만 대형 선풍기 앞에 서서 책 무덤을 바라보는 독특한 감성이 좋았다. 처음에는 5분만 10분만 머물던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이럴 거면 그냥 여기에서 아르바이트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마저 했다. 우리는 계산할 때 이외에는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 노인도 어느새 내가 편해졌던 것일까? 어느 날, 항상 궁금했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날도 선풍기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노인이 느릿느릿 요구르트 하나를 자기 몸 앞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팔꿈치와 손목을 이용해서 요구르트 병이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숭고하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멍하니 보게 되었다. 이윽고 요구르트는 넘어지지 않고 노인의 가슴팍에 안치되었다. 그다음 순간, 노인이 연필꽂이로 머리를 돌리더니 빨대 하나를 입에 물고 뽑아냈다.


“뽁!”


노인이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요구르트 병 꼭지에 꽂아 넣으며 귀여운 소리가 났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웃긴 것도 아니고 흐뭇한 것도 아닌 묘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요구르트를 두어 번 빨던 노인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거무스름한 치아가 어딘지 무덤과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서점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 서로 소통하지 않던 사이였지만, 이 기회에 나도 아껴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유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할 말이 있는데요, 책 무조건 100원에 팔죠? 그러시면 안 될 것 같아요. 되팔이 같은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이용당하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노인의 표정이 다시 사라졌다.


“책 제일 뒤를 보면 가격이 있어요. 보이죠? 3000원. 이건 5000원. 잘 모르겠으면 그냥 0을 하나 빼고 파세요. 안 어렵죠? 그렇게만 팔아도 충분해요. 아마 세상에서 제일 싸게 파는 서점일 거예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가격 표시를 노인이 쳐다봤다. 왠지 뜨끔한 생각이 들어 손을 치웠다. 나에게만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이 괜히 미안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책 제일 뒷장을 넘겨보라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분위기가 다시 뻘쭘해졌고, 그날은 책도 사지 않은 채 그대로 집에 돌아갔다. 배려가 부족한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내가 본 노인의 미소는 이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한참 동안 서점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항상 헌 책방과 노인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스스로의 실수로 나의 소중한 장소를 잃었다는 아쉬움이 컸다. 노인에게 했던 나의 행동에 죄책감도 있었다. 반복되는 생각이 꼬리를 물던 끝에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그 많은 요구르트는 누가 세팅해 주는 걸까? 책을 판매는 하는데, 구매는 어떻게 하시는 걸까? 식사는? 의수를 쓰는 것은 아직 한 번도 못 봤는데... 반복되는 의문이 이번에는 작은 바람으로 이어졌다. 불편하시지 않게 요구르트를 세팅해 드릴 수 있을 텐데, 책을 종류별로 분류해 두면 좀 더 손님들이 많아질 텐데, 칙칙한 분위기가 좀 밝아지면 좋겠는데, 포스터라도 붙이는 건 어떨까?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잖아? 안 되겠다. 내일은 다시 가봐야지.


헌책방을 오랜만에 방문하는 길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상처받으셨으려나?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그래도 손님이니 쫓아내지는 않을 텐데. 빨대를 꽂는 모습을 보여서 창피하시지는 않을까? 복잡한 생각으로 책방 앞에 도착했는데, 양복을 입고 안경을 낀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동안 이 헌책방에 다니면서 나와 노인 외에 다른 사람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승용차에서 책 더미를 몇 개 꺼내어 책방 안에 내려두고 연필꽂이에 빨대 여러 개를 우루루 꽂았다. 그리고는 책방을 나가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동안 노인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노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노인은 느릿느릿 나를 돌아보더니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화가 난 걸까? 나를 쫓아내려고 하시는 건가?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내려와 책방 안쪽으로 걸어가신다. 벽 끝 책장 앞에 가서는 나를 돌아보시며 손 짓을 하셨다. 오라는 건가 싶어 따라갔는데, 다음 순간 마법이 펼쳐졌다. 책장 아래 부분이 열리며 통로가 생긴 것이다. 1미터도 안 되는 높이의 낮은 문. 노인은 몸을 낮춰 책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앉은 자세로 따라갔다. 그 안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TV와 이불, 접는 탁자와 소형 냉장고까지. 1인용 벙커에 온 느낌이었다.

노인은 냉장고 문을 열고 탁자에 반찬 통을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범한 밥그릇이 아닌 넓적한 접시에 밥을 펐다. 손이 없는데 어떻게 하시려나 싶었는데, 숟가락이 달린 막대 같은 것을 팔에 장착하셨다. 기본은 일반 의수처럼 보였지만, 숟가락이 조악하게 테이핑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직접 만드신 것 같기도 했다. 두 그릇을 뜨는 것으로 보아 나도 같이 먹자는 것 같았다. 밥솥 옆에 있는 통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들어있었다. 반찬은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것뿐이었다. 나도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했다. 밥에 슥슥 비벼 먹는 콩자반이 정말 맛있었다.


그 이후 헌 책방은 다시 나의 케렌시아가 되었다. 몇 년간 계속 다녔지만, 함께 식사를 한 것도 노인의 미소를 본 것도 그 이후에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서로 말없는 사이로 돌아갔고 언젠가부터 책을 구매하지도 않게 되었다. 손님이 오면 가끔은 대신 돈을 받아드리기도 했다. 헌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게임 매장에서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하게 되며 한동안 헌책방에 들르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인가를 지내고 휴가 시즌에 맞춰 오랜만에 방문하기로 했다. 계획을 세운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이었다. 돈이 여유가 생겼으니 이번에는 책을 잔뜩 사야지. 좋아하실까?

그날도 많이 더웠다. 한 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공고 뒷문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서 헌책방을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서점은 텅 빈 점포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주변 골목을 한 바퀴 돌았지만, 여기가 틀림없었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더위를 식히자는 생각에 근처 슈퍼에 들어갔다. 슈퍼 아저씨는 런닝만 입고 있었는데, 말이 많은 분이셨다. 아유 덥죠? 하면서 별별 이야기를 하시길래 질문했다.


“저기 헌 책방 있지 않았나요?”

“아, 어느 날 트럭이 와서 다 실어가 버리더라고. 거기 찾아왔나 봐? 그 사장님 참 대단한 분이지. 6.25라고 했던가? 아무튼 전쟁 때 양팔을 다 잃었다는데, 그래도 저러고 사는 거 보면 배우는 게 많아. 가끔 아들이 와서 밥이랑 챙겨주는 것 같던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 사기당한 건 아니겠지? 잘 사시면 좋겠는데. 그 양반이 오렌지 주스를 참 좋아하지. 아들이 매번 사주더라고.”

쓸데없는 TMI가 많이 섞이긴 했지만,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30분 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셨구나. 내 앞에서는 항상 요구르트만 드셨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분을 호칭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그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할아버지? 선생님? 사장님? 그분은 나를 뭐라고 부르고 싶으셨을까? 나를 기억하실까? 떠나게 되면서 적어도 나를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주셨을까?


그날 이후, 더 이상 그 길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내로 가는 지름길은 다른 곳이었으니까.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이었다. 지금도 장애와 관련된 무언가가 언급될 때마다 떠오른다. 나보다 한 단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노인의 거무스름한 미소,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의 방, 뽁 하는 소리를 내는 요구르트. 무엇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콩자반. 그분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문득, 생각나서 찾아본 헌책방 자리. 지금은 배달 전문 음식점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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