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달리며 생각했다. 진작 체력 관리를 좀 해둘걸. 땀이 빗방울처럼 묻어났고 숨쉬기가 괴로웠다. 폐활량 문제일까? 천식이라는 핑계로 운동을 게을리한 탓이다. 뒤에서 화난 얼굴로 달려오는 남자. 그리고 도망가는 나.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 소리치는 것은 오히려 뒤에 있는 남자였다.
“도둑이야! 도둑놈 잡아라!”
남자의 외침에 주변에서 나를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을 가린 채 가까운 상가 건물로 무작정 뛰어 들어갔다.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올라서는 순간 망했음을 느꼈다. 계단은 하나뿐이었고, 그가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가까운 여자 화장실 칸에 뛰어 들어서 문을 잠갔다. 설마 여자 화장실에 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기어이 2층에 도착한 남자의 발소리와 성난 숨소리가 들렸다. 내 숨소리도 저렇게 크게 들릴까?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한 시절, 동생이 안타까웠다. 내가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는 동안 집에서 나만 기다렸으니까. 같이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에 하굣길마다 작은 장난감을 하나씩 사갔다. 유아용 퍼즐이나 고무 인형 같은 시덥잖은 물건들이었지만, 진심을 담아서 골랐다. 이런 모습을 본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학교 앞 문방구로 향했다. 육성 회장으로 큰 기부금을 아낌없이 쏟아부으시던 시절이었기에 학교 주변에서 유명 인사였다. 당연히 문방구 아줌마도 알아보고는 반겨 주셨다. 어머니가 아줌마와 무슨 이야기를 했고 그때부터 문방구는 나에게 무한 창고가 되었다. 일단 갖고 싶은 것을 아줌마에게 말하고 가져오면 나중에 어머니가 지불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이를 전문 용어로 외상이라고 한다. 그날부터 친구가 급격하게 늘었다. 하교 길에 나와 함께 가면 문방구에서 불량 식품을 몇 개씩 쥐어갈 수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돈으로 친구를 샀던 건가 싶어 찝찝하기도 하다.
어느 날 문방구에 고무줄을 걸어 쓰는 종이 인형이 들어왔는데, 당시 유행하던 모래요정 바람돌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고무줄을 걸고 손을 놓으면 종이가 뒤집어지면서 위로 튀어 오르는 단순한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왠지 종이 인형이 뒤집어질 때마다 주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피카피룸룸 카피카피룸룸 이루어져라! 아줌마에게 2장을 가져간다고 하고 들고 나왔다. 오늘은 이걸로 함께 놀아야지! 그 길로 집에 가서 동생에게 바람 돌이 뒤집기를 보여주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내가 가져온 것은 2장이었는데, 뒤집기를 하고 나니 3장으로 변한 것이다. 동생은 형이 마술을 부린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원리를 이해했다. 종이 인형이 겹쳐져 있던 것이다. 분명히 2장을 사 왔는데 3장이 들어있다니? 어린 마음에 이 특별한 마술을 시험해보고 싶어 졌다.
그때부터 소소한 장난이 시작되었다. 아줌마에게 2개 가져간다고 말하고는 3개를 가져오고, 1개 가져간다고 말하고는 2개를 가져왔다.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가져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개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0개에서 1개가 되면 진짜 마술인 것 아닐까? 처음에는 볼펜으로 시작했다. 구경하는 척하면서 소매 안으로 미끄러뜨리면 될 테니까.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그런 마술이 어디 있냐며 믿지 않았다. 그렇게 시연을 해 보이며 일이 점점 커졌고 의뢰를 받아서 물건을 훔쳐다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끔은 예전처럼 친구들을 우루루 데리고 가서 불량 식품을 사주기도 했다. 왠지 평범한 학생과 괴도라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진 것 같아 멋지게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셜록 홈즈보다 뤼팽을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친구를 위해 무언가를 훔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닌 멋진 행위라고 생각했다.
전학 가는 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문방구 아줌마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남은 금액을 계산하시며 결코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하셨다. 내 인생 최초로 소름이 끼친다는 표현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얼마를 더 드리면 되나요? 도둑 놀이한 것도 체크해 두셨어요? 혹시 더 있을지도 모르니 충분히 드릴 게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어머니와 아줌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들킨 걸까? 나 스스로를 괴도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애송이일 뿐이었다. 크게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도 문방구 아줌마도 미소 지으며 말하셨다. 새 학교에서 도둑 놀이는 하지 말아라. 세상에는 아줌마처럼 좋은 분만 있는 건 아니거든.
“사연을 알려주면, 내가 훔쳐다 줄게.”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본격적인 도둑질을 시작했다. 전학 가던 날의 수치심을 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그만두면 왠지 괴도로서 실격하는 느낌이었다. 대신 규칙을 정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만 도둑질을 하기로. 나름 좋은 일을 하는 의적이라는 콘셉트는 지키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짜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연에 움직이겠는가. 배가 고프다는 사연, 사탕을 먹고 싶은데 엄마가 뺏어 갔다는 사연, 준비물을 깜빡하고 와서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무섭다는 사연. 별거 아닌 이야기에도 도둑질을 했다. 매번 자잘한 물건들이기는 했지만, 친구들은 항상 고마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개중에는 나를 이용한 친구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옆 동네에 잘 알려진 훔치기 선수(?)가 대형 프라모델을 훔쳤다는 소문이 들렸다. 드라고너라는 로봇의 커스텀 버전이었는데, 살짝 과장하면 박스가 내 몸집만 했다. 요청하는 사연은 없었지만, 왠지 훔치고 싶었다. 내가 옆 동네의 이름 모를 머시기보다 뛰어난 도둑임을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프라모델 박스를 등에 딱 붙이고 옷 안에서 벨트로 몸에 묶었다. 그 위로 텅 빈 백팩을 멨다. 이렇게 하면 부자연스럽게 등이 튀어나온 것이 어색해 보이지 않겠지? 글로 쓰면 단순해 보이지만 이 모든 동작을 빠르게 시행하기 위해 집에서 수없이 연습한 터였다. 그렇게 나는 드라고너 커스텀을 훔쳐낸 도둑으로 이름을 날렸다…를 기대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 방법으로 조이드도 훔쳐냈지만 역시 친구들의 환호성은 들리지 않았다.
운명의 그날. 어려운 사연이 도착했다. 변신 로봇 군단 프라모델 8개 세트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연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내용이었지만, 동시에 8개를 훔쳐야 한다는 엄청난 난도에서 도전의 가치가 느껴졌다. 그물형 장바구니를 구해서 안쪽에 과자 박스 같은 것을 붙였다. 그리고 조잡하게 나무 같은 것을 덧대어 내부에 공간을 만들었다. 과자가 잔뜩 담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텅 빈 공간이 있는 형태였다. 물론 상상 이상으로 조잡한 모습이긴 했다. 이걸 들고 문방구에 가서 하나씩 하나씩 장바구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너무 신중한 탓이었는지 문방구에 머문 시간이 과도하게 길어진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마 문방구 아저씨는 그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저씨가 소리쳤다.
“이 도둑놈아! 그동안 훔쳐간 거 다 네 짓이지?”
나는 문방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성난 아저씨가 따라오며 도둑 잡아라 소리를 질러 댔다. 아니 저 아저씨는 왜 자기 가게도 내버려 두고 쫓아오는 거지? 그 사이에 다 털리겠구먼! 도망치는 와중에 장바구니는 주차장에 아무 차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도망치던 끝에 상가 2층 여자 화장실까지 도달한 것이다. 충분히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버티고 버텨서 조심스럽게 상가에서 나왔다. 문방구 주인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밑에 숨긴 물건을 찾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자동차는 이미 빠진 뒤였고 내가 던져 놓은 장바구니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다 훔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몇 개는 들어있다. 이것 만이라도 가져다줘야지. 장바구니를 들고 몇 걸음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 뒷덜미를 들어 올렸다.
“잡았다! 너네 부모님 누구야? 학교는 어디냐? 전화번호나 집 주소 대!”
아저씨에게 무릎을 꿇고 울며 수없이 빌었다. 문방구에 오는 어른들마다 사연을 묻고는 한 마디씩 훈계했고 그럴 때마다 더 서럽게 울었다. 다행스럽게도 문방구 아저씨가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도주했으니까. 도망치며 떠오른 것은 도둑질에 대한 죄책감이 아닌 의아함이었다. 분명히 저 아저씨는 문방구를 내버려 두고 나를 쫓아 왔는데, 왜 문방구에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지?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거라고? 그럴 리가.
이 날이 나의 마지막 도둑질이었다. 더 이상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된 것에는 붙잡힌 충격도 있었겠지만, 이후 더 재미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 둘째 외삼촌은 한국에 최초로 닌텐도의 패미콤을 수입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나에게도 게임기가 생긴 것이다. 뜬금없는 선물이었기에 혹시 삼촌은 알고 계신 건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액션이나 루팡 3세 등 게임으로 하는 도둑질이 훨씬 재미있었고 심지어 총도 쏠 수 있었다. 사촌형의 PC로는 사보추어를 플레이했다. 이후 보난자 브라더스 등 동생과 함께 협력해서 도둑질하는 게임들을 하며 위험부담 없는 스릴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 세계에서의 도둑질은 자연스럽게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이후 어떤 게임을 하더라도 직업 선택에 도둑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선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사나 마법사를 선택하지만 왠지 특별한 끌림이 있다. 동생도, 함께 게임을 하는 친구들도 당연히 내가 도둑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온 것은 아닐까? 고등학교에 가서는 직접 쓴 시나리오로 TRPG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전설의 도둑 NPC. 그 이름을 마이즈라고 지었다. 그는 사연을 듣고 물건을 훔쳐주는 의적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내가 되고 싶던 모습을 시나리오의 형태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궁금해졌다. 만약 처음 ‘도둑 놀이’를 했을 때 문방구 아줌마에게 혼났더라면,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에게 혼났더라면, 하다못해 전학 가는 날 더 크게 주의를 들었더라면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까? 문방구 아저씨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점점 더 발전해서 범죄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중2병의 폭발로 정의로운 괴도가 되었을까? 문방구 아저씨에게 들킨 후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연락이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다른 세계선의 나는 진짜 도둑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에서의 나는 비록 도둑은 못되었지만, 평생 동안 훔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 좋은 콘텐츠를 창작해서 사람들의 시간을 훔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 물론, 의적이라면 그렇게 훔쳐낸 시간만큼의 의미는 돌려줘야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