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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사원의 조건

직군 면접과 수습 평가 통과하기

by 마이즈 Jan 16. 2025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혹시 또 쓰러지셨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잔뜩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자랑스러운 아들~!”


우리 회사에서 편지를 받았다고 하셨다. 회사에서요? 무슨 편지죠? 놀란 마음에 묻자 집에 와서 직접 확인하라 신다. 저녁에 가급적 빠르게 퇴근했다. 동료들을 보기 민망했다. 혹시 안 좋은 내용이면 어쩌나…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수습 평가에서 결국 탈락인 걸까? 귀가 후 탁자에 놓인 박스를 열었다. [자녀분을 잘 키워주고 우리 회사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상장과 편지, 그리고 컵 세트가 들어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아. 이런 것이 대기업이구나. 어머니는 그때부터 내가 다니는 회사를 주변에 자랑하셨다. 그랬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N사에 합격한 것이다. 5번째 도전이었고, 그 사이 6개의 회사를 다니며 어느덧 경력 10년 차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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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 회사를 퇴사한 이후,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높아졌다. 시기적절하게 N사에서 먼저 연락이 오며 5번째 도전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입사 절차가 길어지며 또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어머니는 생활비를 왜 이리 적게 주냐며 투덜대셨다. 한 달쯤 지나 직군 면접일이 잡혔다. 자신만만하게 들어간 1:1의 직군 면접. 당시 나를 평가하신 분은 미래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 디렉터 중 한 분이 되겠지만 그때는 알 리가 없었다.


“여러 직군의 작업을 많이 하셨네요. 기획 업무 중에 제일 자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자신 있는 것은 시스템이고, 좋아하는 것은 시나리오와 밸런스입니다.”

“자신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다르군요. 밸런스라… 왜 밸런스를 좋아하지요?”


이 질문에 미래에 이불 킥을 할 만한 답변을 했다. 역시 그때는 알 리가 없었다.


“숫자는 마법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만 달라져도 게임이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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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만만한 나에게 면접관 님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건넸다. 엄청난 두께였다. 책상에 내려놓는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지난 1년간 M 모 게임의 로그 데이터입니다. 이 내용을 분석해서 향후 서비스 기획 방향을 만들어보세요. 오차 범위는 이 정도, 분포는 이렇게 사용하시고, 이 지표는 사용하지 마세요. 계산기는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수학과 통계라고? 거기에 서비스까지 곁들인 내용이었다. PC도 없이 서류 뭉치를 주고 종이와 펜으로 작성하라고 하니 이 또한 고역이었다. 엑셀이면 훨씬 빨리 할 텐데… 이건 뭐지? 신종 괴롭힘 인가? 어찌어찌 답을 했지만, 면접관 님은 불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대놓고 심한 소리를 하셨다.


“밸런스는 좋아하기만 하셨군요. 그럼 잘하는 것을 평가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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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즉석으로 카드 게임 규칙을 하나 만들라고 하셨다. 물론 몇 가지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수없이 보드게임을 만들어본 나였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빠르게 답안을 제시했다. 이번에는 만족하시겠지?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금 만든 규칙으로 온라인 게임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시스템 플로우를 그려주시고 데이터를 분류하세요. 서버 구조도 잡아 주시고요. 최종적으로는 샘플 코드를 작성하세요.”


이번에도 종이와 펜이었을까? 아니, 더 심했다. 칠판이었다. 게임을 전혀 모르는 프로그래머에게 설명한다고 가정해서 브리핑해보라고 하셨다. 뭐지 이건? 또 괴롭힘 인가? 샘플 코드는 어떤 언어로 할지 물으니 아무거나 하라고 하셨다. 전부 알아볼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역시 대단하다. 그렇게 직군 면접 내내 탈탈 털렸다. 나오면서 100%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역시 N사의 벽은 높구나. 자만할 게 아니었어. 5번째 불합격이겠군.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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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지나고 의외로 합격 통보가 왔다. 출근한 뒤 알게 된 나의 직군 면접 점수는 40점이었다. 탈락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팀 면접과 포트폴리오에서 점수가 높았고 추천인이 있다고 했다. 40점… 지난 10년간의 노력이 고작 이거였나…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3개월 뒤 수습 평가가 남아있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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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사원으로 들어간 팀은 언리얼 엔진으로 슈팅 게임을 만드는 신규 개발 본부였다. 또 언리얼인가 싶어서 아쉬웠지만, 입사한 바로 그 주에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그 대신 국민 게임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레이싱 게임의 후속작 팀에 배속되었다. 개발 엔진은 겜브리오라고 했다. 한 번도 다루어보지 못했기에 걱정이 앞섰다. 수습을 통과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시행했다. 이사였다. 회사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어머니와 함께 지낼 월세 방을 얻었다. 앞으로 3개월간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할 마음이었다. 그래서 몇 시에 출퇴근했냐고? 새벽 4시쯤 가서 씻고 다시 5시에 사무실로 복귀했다. 잠은 책상에 엎드려서 잤다. 아무도 내가 집에 다녀온 지 모를 정도였다. 레이싱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리가 필수였기에 자동차 물리 공부를 시작했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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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중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수습 평가 때문에 집에도 가지 않고 매달리는 거지? 근데 말이야. 너 정말 최선을 다하는 거 맞아? 지금 이대로는 솔직히 탈락이야. 한심하다는 듯 말하셔서 오기가 생겼다. 더욱 업무와 학습에 올인했다. 언젠가부터 팀원 분들이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집에 가라고, 가서 자고 오라고. 프로그래머 형님 한 분은 사내 카페로 나를 불러내더니 조용히 말했다. 무리하지 마라. 나 우리 아들에게 좋은 아빠로 남고 싶다. 아빠? 무슨 말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다. 끔찍한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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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 평가를 한 달 남긴 시점에서 신입 사원 연수를 가게 되었다. 그룹 전체의 신입이 모이는 자리라서 인원이 어마어마했다. 이 중 10%만이 정직원이 된다고 한다. 모두가 경쟁자로 보였다. 첫날, 조 구성이 발표되었다. 우리 조는 게임 기획자인 나와 서버 프로그래머,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 법무팀, 인사팀, 데이터 분석팀, 해외 사업팀, 마케팅 팀 각 한 명씩 총 여덟이었다. 남자 다섯에 여자 셋. 우리는 모두 한 방을 썼다. 물론 여자 셋은 다른 방을 썼지만, 잠자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고 일어나자마자 우리 방으로 왔으니 한 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수 기간 내내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체육 대회처럼 몸을 쓰는 활동이나 2시간 안에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도 했다. 도미노를 만들기도 하고 게임 디자인 워크숍도 진행했다. 대부분의 활동은 다른 조와 경쟁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같은 조원끼리는 똘똘 뭉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조 단톡방은 여전히 살아있고 가끔 만나기도 한다. 이 연수에서 크게 배운 점이 있었다. 혼자 너무 열심히 앞서 가는 것도 민폐라는 점이었다. 도미노를 할 때도 그랬고 체육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료들과 템포를 맞추는 것. 그것 만이 최고의 결과로 이어졌다. 연수 마지막 날, 회식 자리에서 우리 조는 다짐했다. 반드시 수습 평가를 통과하자고. 통과율이 10% 내외라고 해도 어쩐지 우리는 모두 살아남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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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퇴근을 하지 않았다. 3개월간 집에 가지 않은 독종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탈락하더라도 끝까지 노력했다는 핑계가 생길 것 같았으니까. 다만, 이제는 혼자 공부만 하지 않았다. 같은 개발실의 선배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스타일을 익히려 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단기간에 그분들보다 잘하게 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최고의 보조 캐릭터가 되자. 경쟁하지 말고 템포를 맞추자. 그렇게 남은 수습 기간을 채웠다.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고 집에 귀가해 정사원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단톡방에 합격 사실을 알렸다. 우리 조는 전원 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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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모두가 축하 인사를 한 마디씩 해주셨다. 그 가운데 녀석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게임을 만들자고 약속했던 나의 맹우 조군. 이 팀에 나를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녀석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예전에 함께 했던 구름 속 회사는 잊자. 이곳에서, 대기업에서 우리의 진짜 게임을 만들자! 오래전부터 꿈꾸던 대기업 N사에 입사했고, 같은 꿈을 약속한 오랜 친구가 곁에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인 걸까? 이번에야 말로 정말 멋진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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