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다운로드를 싫어하게 된 이유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남은 시간. 담임 선생님은 이 시간을 자유롭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사용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학교에 나가봐야 의미 없이 영화만 몇 편 보고 돌아오는 게 전부였기에 차라리 일을 하자 싶어 매장에 나갔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 시간도 학생의 의무 시간이니 무언가를 배우라고 권해 주셨다. (으뜸) 고민 끝에 한국 유일의 게임 교육 기관이었던 게임 스쿨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당시에는 기획이 없었고 그래픽 반과 프로그램 반 두 개뿐이었는데, 둘 다 너무 비쌌다. 이 학원의 가장 큰 장점은 같은 건물에 게임 회사가 있다는 점이었다. 학원 수강생들 중에 실력이 있으면 바로 취업도 가능하고 그게 아니라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안내를 들었다. 학원 강사님들도 아래층 개발실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겸임하고 계시다는 말에 흥분했다. 진짜 게임 개발자를 만날 수 있어! 꿈을 위한 길인데 돈이 무슨 문제가 되랴. 며칠 더 굶고 며칠 더 일하면 되지!
중학교 때부터 쭉 그림을 그려왔기에 당연히 그래픽 반을 등록했다. 첫 수업에서 연필과 스케치북을 받았고 하루 종일 선만 그렸다. 이 선 그리기를 며칠하고 나서 테스트를 통과하니 이번에는 정물화 대생을 배우고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게임 그래픽 반이었는데, 미술 학원 느낌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 PC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PC 작업을 하는 선배들이 옆 반에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마지막 수업은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책을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그래픽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기에 몇 개 안 되는 선으로 동세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난 몇 년간의 노력 덕분인지 다른 학생들보다 빠르게 손 그림 과정을 넘어갈 수 있었다. (룩백 온 기브업)
PC를 받는 단계가 되면 옆 강의실로 이동하게 된다. 요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예전에는 태블릿은커녕 마우스조차 없던 시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게임 속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키보드의 화살표 키로 커서를 이동하고, 스페이스 바를 눌러 색을 칠했다. 엔터를 누르면 색상 코드 입력창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RGB 코드를 입력해서 색상을 지정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게임 스쿨에 다닌 시기에는 마우스가 보급되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작업하던 회사라면 여전히 DOS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그렇게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게임 그래픽을 배웠다.
매주 1회, 학원에서는 특별한 수업을 진행했다.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나 ‘왕립 우주군’을 모두 함께 감상했고, 작품 안에서의 조명과 캐릭터 동작 등을 토론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혁신적인 교육 방식이었다. 물론,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동안 지나가는 수업 시간은 아까웠다. 학원을 다니며 크고 작은 일거리가 있으면 무조건 참여했고, 돈을 받는 대신 학원 비를 차감해 달라고 요구했다. 청소나 장비 교체, 이사 등에서부터 카운터를 보는 일까지 단기직은 거의 한 번씩 해본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이 사는 방법은 이런 것이지. 그래서인지 출강 나가는 학원에서 수업료를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이 보이면 괜히 마음이 간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학원 바로 아래층에는 게임 개발사가 있었고, 강사님들 중에 겸업하는 분이 계셨다. 수업 자료를 두고 오셨다고 하길래 내가 가져오겠다고 얼른 손을 들었다. 처음으로 진짜 게임 개발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다들 조용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힐끗 보니 매직 더 게더링이었다. 며칠 뒤, 매장에서 퇴근하며 매직 더 게더링 스타터와 부스터를 몇 개 사갔다. 그리고 학원 강사님에게 전달했다. 제가 일하는 가게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어서요. 혹시 좋아하는 분들 있으면 함께 해보세요. 나름 뇌물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사에서 구하는 아르바이트에 선정되었다.
회사 구석에 좁은 자리를 하나 받았다. 책과 서류 등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래서 더 멋졌다. 풀타임 근무는 아니었지만 할당량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학원 자습실에서 해도 되고 내려가서 사무실에서 할 수도 있었다. 학원 PC가 더 좋기도 했고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이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구형 PC로 끙끙대며 작업을 했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했다. 나에게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으니까.
아르바이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다. 모눈종이 형태로 주어진 그림에 맞춰서 정해진 컬러를 칠하는 단순 반복 작업이었다. 당시 그래픽은 도트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점을 하나하나 찍어야 했다. 이럴 거면 왜 스케치북과 연필로 선 긋기부터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저 즐거웠다. 매장에서 일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창조의 기쁨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그려낸 집들이 게임 속 마을에 배치되었다. 직접 테스트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분들의 화면에 내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며 뿌듯했다.
어느 순간, 회사에 비상 상황이 생겼다. 3D 그래픽이 대중화되면서 유통 업자들이 2D 게임의 물량을 대폭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강의 상황을 건너 들었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만든 게임을 엎고 3D로 교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급여를 주기 힘들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대신 게임이 출시되고 나면 한 번에 밀린 금액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직원부터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끝까지 남겠다고 했다. 돈이 무슨 문제일까. 따로 벌면 되지! 그보다 내가 참여한 게임이 끝까지 완성되는 것이 더 절실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했던 작업을 모두 새로 할 필요는 없었다. 지붕만 새로 찍으면 된다고 했다. 당시에는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는 상황이다. 기존 경력자들도 3D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게임이 출시되었다. 어릴 때부터 콘솔게임을 다양하게 플레이하던 내가 보기에 만듦새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첫 작품에 대한 환상은 있게 마련이 아닌가? 일단 판매가 시작되면 못 받은 알바비를 받을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몇 달간 쌓인 미지급액이 꽤 컸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임이 망한 것이다. 너무 못 만들어서 망했을까? 차라리 그랬더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와레즈라는 사이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든 게임이 불법으로 공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잘될 게임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한동안 급여도 못 받으며 개발실에서 먹고 자던 형들이 안타까웠다. 나야 고작 아르바이트 비용이니 얼마 안 되겠지만, 생활이 걸린 저 형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보상해 주겠는가? 와레즈는 결국 한 회사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끔찍했다. 그리고 다닐 기회가 있던 회사가 사라지게 되면서 나 역시 자연스레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인생의 전환점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평화로운 대학생활)
그날 이후 불법 다운로드를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한 때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나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다운로드했지만, 한국에서 정식 서비스된 이후에는 무조건 제대로 값을 지불하며 이용한다. 탈옥이니 개조이니 하는 방식은 거부하며 보이는 족족 신고할 정도로 불법 공유를 막는데 진심이다. 물론 나도 게임 매장에 일하는 동안은 게임기를 개조했고 불법 복제품을 판매하기는 했지만, 과거의 죄를 항상 뉘우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콘텐츠라도 누군가의 노력들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길든, 짧든 어느 정도의 시간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아무런 대가 없이 함부로 이용하는 것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세상에서 창작자로 살아가려면 다른 이의 창작물 또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