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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토리 May 19. 2024

라일락 꽃향기 맡으며

쉰 살의 유학일기 - 봄편 #5

삿포로는 지금 꽃천지다.

겨우내 두터운 눈을 지고 있던 나무들이 노릇노릇해 자는가 싶더니 벚꽃이 피었다.

일본 하면 다들 벚꽃을 떠올릴 정도로 사쿠라에 진심(?)인 나라라 홋카이도의 벚꽃을 무척 기대했었다.

매일 아침 뉴스에서 桜前線(사쿠라젠센, 벚꽃전선)을 보도하고 남쪽부터 올라오는 벚꽃들의 소식을 시시각각보도하니 삿포로의 벚꽃은 어떨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 앞 공원의 산책로는 양옆이 벚나무다!

꽃이 피면 핑크빛 화사한 꽃터널이 생기겠지?


그러나 웬걸…

벚꽃은 ‘피었으나 피지 않았습니다’였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었나…

몽글몽글하고 빽빽하게 구름처럼 피어날 거라 생각했던 벚꽃은 탈모치료받는 사람 머리숱처럼 헤슬헤슬했다.

엥? 이게 다야?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추운지…

그래도 좋다고 벚나무 밑에서 패딩 껴입고 달달 떨면서 꽃놀이라는 걸 하는 일본사람들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국은 말이야!!! 진해처럼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어도 말이지, 이 정도로 헐렁하진 않다고!

실제로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벚꽃길만 못했다.

일본에 살면서 벚꽃으로 국뽕이 차오를 줄이야!

홋카이도 신궁의 벚꽃. 4월 26일
나카지마 공원의 벚꽃. 4월 21일
작년 3월에 찍은 동네 벚꽃길. 대전 전민동


홋카이도의 벚꽃은 일본의 다른 곳에 비해 좀 빈약하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아마도 날씨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벚꽃이 지고 그다음 꽃주자인 라일락이 피기 전에 갑자기 왁하고 추워지는 기간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 기간을 リラ冷え(리라비에)라고 부른다.

리라는 홋카이도 사투리로 라일락을 뜻한다. 일본 본토에서는 花冷え(하나비에)라고 한다.

우리말로 치면 딱 꽃샘추위가 되겠다.


니가 하도 춥다고 그러길래 얼마나 춥겠어하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상상했던 추위가 아니었어.

겪어봐야 알 수 있는 추위였더라고.


이 기간에 놀러 왔던 내 친구들이 했던 말이다.

이 기간의 삿포로는 옷차림만으로 관광객과 현지인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

두툼한 패딩, 못해도 경량패딩에 모자, 머플러 둘둘 감고 있으면 현지인, 4월이라는 일반적인 달력에 맞춘 복장을 하고 있으면 관광객이다.


그렇게 벚꽃이 지고 꽤 살벌했던 리라비에를 겪고 나니 삿포로는 갑자기 꽃천지가 되었다.

여기저기 작은 화단이며 가로수 아래에 튤립, 수선화, 무스카리, 크로커스가 피었고, 꽃잔디가 바닥을 진분홍 카펫으로 깔면 그 위에 은방울 꽃이 피어났다.

헤실헤실하던 벚꽃대신 겹벚꽃이 풍성하게 피었고 눈대신 이름 모를 하얀 꽃이 나무를 가득 채웠다.

주먹만 한 알사탕을 품었던 작약은 내 얼굴보다 더 크게 꽃을 피웠고 주렁주렁 등나무 꽃이 커튼처럼 내려왔다.


그리고 리라비에가 끝나자마자 이름처럼 라일락이 온 동네를 향기로 채웠다.

지금 삿포로는 라일락축제 중이다.

왜 라일락축제를 하는지 알만할 정도로 온 동네가 라일락 천지다.

꽃도 꽃이지만 향기가 환상적이다.

나카지마 공원에 이렇게 라일락이 많은 줄 몰랐다.

아침에 산책할 때, 학교 갔다 돌아올 때 시간 날 때마다 멍 때리기를 하고 있다.

하늘 보며 하늘멍, 잔디 보며 잔디멍, 호수 보며 물멍, 꽃보며 꽃멍…

라일락 향기 속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봄 속에 내가 온전히 품어진 느낌이다.


오도리공원에서 라일락 축제 중이니까 슬슬 산책 삼아 가서 맥주 한잔 해야지 하고 나섰는데…

인파에 파묻혀 한 블록을 떠밀리다가 맥주는커녕 사진도 한 장 못 찍고 집에 돌아왔다.

휴일에 간 내가 바보지… 아,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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