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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eze Nov 27. 2024

단단한 걸 깨려면 그것보다 더 단단한 것으로 깨면 되지

어느 날, 마을 버스를 기다리며 지루해진 제제는 움크리고 앉아 노란색 단단한 무언가를 나뭇가지로 두드리며 빻는 놀이를 했다. '엄마! 엄마도 앉아서 이거 깨봐~' 라고 말하며 나를 동참시킨다.



단단한 걸 깨려면 그것보다 더 단단한 것으로 깨면 되지


난 가끔 어떠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한 말이지만 흠칫 놀라며 훅 새겨지는 말들이 있다. 그 날 제제에게 했던 말도 그러했다. 그리고 오늘 이 새벽 그 말의 의미를 또 내 삶 속에서 찾아 연결시키고 정리해둔다.




나에게 사랑은 빈 캔버스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괜찮다,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이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랑하는 이들의 상실로부터 받은 진정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진 이 빈 캔버스가 무엇의 배경이 되어야하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삶은 나에게 그 지혜를 주기 위해 경험을 선물하며 내가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또 그 길을 열어주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빈 캔버스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라며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들로 부터 탈피하려고 노력했고, '있음'에 집중했다. 그 존재가 있음에, 그리고 그 존재 곁에 있음에 말이다. 이것은 내가 상실로 받은 상처 덕분에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히 귀함을 진정 깨달았고, 그것이 바로 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와 함께 하면 무언가 모르게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 같아서 고맙고 참 좋다는 존재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나 나의 빈 캔버스는 존재의 배경이 되는 것이지, 죄를 짓는 행동과 말인 에고의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와 에고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혼란스러웠고, 참회했고, 끊임없이 나를 혐오했다. 왜냐하면 빈 캔버스가 되어주고 싶은데 불쑥 불쑥 '그건 아니야!' 라는 내 목소리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빈 캔버스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삶에서 알아서 부서져 버렸다. 신기하게도 그 항목은 그리스도 십계명에 나와있는 것과 같았다. 도둑질, 간음, 이웃에 대한 거짓 증언 (험담). 모두 내게 소중한 이들을 거울 삼아 그 지혜를 배우게 했고, 나는 기준이 없었던 탓에 모두 나의 교만과 자기 혐오의 고통에 빠지게 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는데..' 라며 말이다. 게다가 시절마다 소중하고 가까웠던 이들이 거울이 되었으므로 죄책감과 그들이 맞음을 스스로 설득하고, 내가 틀렸다며 끊임없이 자책하고, 미안하게 했다.


때가 되어서일까. 나에게 그토록 단단하게 자기 혐오에 빠지게 했던 그것이 더 단단한 것으로 깨어져버렸다. 바로 '사랑'으로 말이다. 존재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닌 것에 빠져있기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사랑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진 에고의 허상에 헤엄치며 이 세상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눈을 감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기 기만으로 빠진다. 자신은 안다며 말이다. 나 역시 이 지구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 무지의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우린 집단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고, 그 에너지장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뭣이 중헌지를 알고 내 나침반을 '사랑'으로 향하며  내 똥을 닦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은 스스로 '선택'하며 배워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빨간색, 파란색처럼 세상에 공유된 지식을 통해 붙은 라벨은 분류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다. 내가 습득하지 않은 지식은 대단히 많다. 단순히 말해서 나는 의학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몸을 팔, 다리, 얼굴 등 이렇게 분류하는 것 밖에 못하지만 전문가는 또 다른 분류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 아닌 전문가적 견해다. 반면에 자신의 경험으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추측과 망상으로 존재를 단정짓는 것은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행동과 말은 내가 아닌 타인에겐 그것이 바로 '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보여주는 '내'가 타인에겐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거짓증언한다해도 그것은 곧 타인에게 '나'가 된다. 그래서 우린 참회를 하고 스스로를 닦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남을 닦으려 하기 보다 자신을 닦아야하는 분명한 이유다. 타인을 돕는 것과 타인을 닦는 것은 다르다.


우린 모두 같은 인간적 한계가 있는 존재다. 그 종류와 수치가 사람마다 들쑥 날쑥 다를 순 있지만 지구인의 외적 모습이 이러하다-하는 것처럼 인간이 가진 한계가 있음은 모두 같다. 그렇기에 우리의 존재는 모두 귀하다. 다르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이들이 거울이 되어 나에게 '사랑'으로 또 한번 나 스스로 깰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우리의 한계는 서로의 안내자가 되기 위해 타고 태어난 또 하나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에게 배움을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그 배움의 과정이 고통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지식적 분류와 허상의 판단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고, '사랑'에 주파수를 맞추어 <매 순간 사랑이길>을 오늘도 기원한다. 더 단단한 것으로 그 단단했던 것을 깼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영혼의 주모님이 물으셨다.
"자네는 지구에 왜 왔나?"

나는 대답했다.
"사랑하러요"


박노해 시인 - 다른 오늘, 전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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