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성정치_1부. 가부장제의 고기 텍스트들
4장. 말이 살이 되어
피타고라스의 가르침들
가부장제 문화에서 채식주의의 호소력이 부족한 주된 요인은, 그것이 논의되는 시간과 장소-채식주의자는 주로 식사를 하면서, 또는 식사 시간에 자신이 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에도 원인이 있다.
'말이 살이 된다the word made flesh'는 생각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 의미는 채식주의를 말하는 어떤 사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거나 책을 통해 그런 주장을 읽고 난 다음에 육식에서 채식주의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채식주의의 말이 살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식사 시간에 오고가는 육식에 관한 대화들이 말이 살이 되는 일종의 대안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채식주의 저항문학
채식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문학으로는 플루타르크가 육식을 반대하면서 쓴 에세이 두 편, [육식에 관하여]와 [육식에 대한 에세이]에서 시작해 [채식주의-삶의 한 방식], [대안으로서 채식주의], [채식주의자 지침서]같이 근래에 출간된 저술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3년 6개월 된 내 아들은 아빠에게 죽은 닭고기를 먹지 말아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기 자신도 몸소 채식주의를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아빠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실망한 아들은 '고기를 먹지 말 것'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다.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글자 그대로 말이 살이 된다는 신념은 내 아들에게는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아들은 금지 조항을 조목조목 적어 놓은 다음 아빠에게, "죄송해요, 아빠. 하지만 이제 더는 고기를 드실 수 없어요. 이렇게 적어 놓았거든요."라고 말했다.
채식주의의 말이 살이 되어
채식주의의 관념은 상당 정도 책을 모체로 하고 있다. 이 관계가 채식주의의 말이 살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물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의 사상을 접하게 되는 것은 채식주의의 단어/말을 읽는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채식주의자와 채식주의 관련 대화를 나누거나 논쟁을 벌이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런 논의는 종종 식사 중에 진행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일어나는 일은 채식주의의 말이 살이 된다는 앞의 주장과 정반대다. 식사 때 채식주의자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고기의 텍스트가 대화의 주제가 될 때, 그리고 요리에 고기가 들어가 있을 때 부지불식간에 전투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싸움을 작정하고 하는 대화들
채식주의는 육식을 지지하는 지배 담론 내에서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켜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항상 염려하는 것은 육식가들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들의 신념이 처할 수 있는 운명이다. 내과의사이자 사회개혁가 해리엇 케지아 헌트는 "나는 항상 니콜스(채식주의자)의 그레이엄주의와 다투었다"고 쓰면서 채식주의자들의 소극성을 지적한다. 존 오스왈드는 1791년에 쓴 채식주의 관련 저술 [자연의 외침]을 출간하면서 "내 삶의 방식의 독특성에 대해 밀려오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고, 친구들에게 납득시키느라 힘들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렇게 육식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태도를 밝히고 있는 만큼, 앞으로 "방해 없이" 채식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명한다.
급진적 낭만주의자이자 출판업자였던 리처드 필립스경과 같이 식사하면서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 여행가이자 저술가인 조지 보로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경에게 여쭈었다. "경께서는 육식을 안 하십니까?" 경은 대답했다. "그렇소, 선생."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짐승을 죽이지 않으면 그 수는 계속 불어날 것이고, 어느 순간 국토는 그들로 들끓을 텐데요." "선생,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인도에서는 소를 죽이지 않소. 그런데도 땅은 충분하다오."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자연은 파괴될 것이고 짐승은 서로 잡아먹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짐승 천지가 될 거예요. 모든 곤충, 새, 벌레들이 멸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경은 말했다. "이제 그만합시다. 나는 별 이득이 되지 않는 이런 논의는 계속하고 싶지 않소."
이런 얼토당토 않은 질문은 마지막에 리처드경이 대화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처럼 채식주의자로 하여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질문에 대답하는 자체에 대해서도 머뭇거리도록 만든다. 이 경우 대화의 패턴은 1970년대 초에 식사 시간에 자주 오고갔던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와 많이 닮아있다. 이 당시의 대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던져졌던 질문은 페미니즘에 대해 정의를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이 "당신도 그 말 많은 전투적 여성해방 운동가요?"라는 식의 페미니즘을 경멸하는 듯한 질문에 맞서는 것처럼, 채식주의자들도 "당신도 건강에 미친 사람이요?" 또는 "당신도 동물 애호가요?"라는 채식주의를 경멸하는 듯한 질문에 맞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우리 남자들 역시 해방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에 직면하듯이, 채식주의자들은 "식물도 생명이 있다"는 원리론적인 주장에 맞닥뜨린다.
식물도 당연히 생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초식동물이 고기가 되기 전에 소비하는 엄청난 양의 식물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식탁에서 먹는 채소에 대해 우리가 왜 책임이 없겠는가를 인내심을 갖고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물론 이상의 질문에 대해, "우선 남성들은 자신들의 지배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거나 "당신은 상추의 고통이 도살 과정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소의 고통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등 좀 더 급진적인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만약 페미니스트 또는 채식주의자가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면, 남성이나 육식가는 이런 비난 섞인 질문으로 인해 수세적인 자세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채식주의자 또는 페미니스트에게 정치적, 개인적, 실존적, 윤리적으로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식사 중에 나누는 여담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성폭력, 가정 폭력, 포르노그래피 등의 문제가 빠르게 페미니스트의 관심사로 부각되던 1970년대 중반에, 과연 얼마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 여성 폭력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까? 함께 식사를 하던 육식가에게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를 질문받았을 경우, 채식주의자는 다음 사항을 항상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질문을 던진 사람이 정말로 내가 동물이 도살되는 방식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자신의 채식주의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지 등. 그리고 식당 종업원에 대한 예의도 식사 예의범절에 들어간다.
이 경우 채식주의자는 자신의 권한을 박탈하려고 달려드는 여러 시도들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과 채식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그 개념들을 재정의하고, 범위를 명확히 하며, 권한을 박탈하려는 시도들이다. 여성 성폭력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는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말을 들으며, 동물의 죽음을 강조하는 채식주의자는 감상에 젖었다는 비난을 받는다. 누가 페미니스트인가 또는 누가 채식주의자인가는 사실 난처한 질문이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기본 원칙들은 "도덕적 원칙"들로 환원된다.
채식주의자가 객관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지만, 육식가와 같이 식사하면서 실제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는 아무도 없다. 이런 객관성 부족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채식주의가 육식가들의 처지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모호한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 고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궁극적으로 이런 복잡성은 "고기 이야기"가 실존한다는 사실이며, 그리고 이것이 육식가들의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고기 이야기란 고기가 음식의 하나라는 것을 결정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고기 이야기
생명에 접근하는 우리의 방식을 규정하는 전제들 중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야기에는 끝이 있고, 우리는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야기는 고기, 즉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식사는 끝이 있다)이다. 식단에서 고기를 제거할 때, 채식주의자들은 고기 이야기의 결말을 제거하는 것이다. 육식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야기를 말하는 종족들이다. 우리의 역사는 기, 승, 전, 결로 구성되어 있는 이야기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야기가 결말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그 결말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몇가지 해소를 달성한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우리는 이야기 전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야기의 종결은 의미의 폭로이고, 의미는 이야기가 끝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을 재차 강조한다.
육식은 동물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의 실존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말은 롤랑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매우 다양한 장르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각각의 장르가 다루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동물의 삶과 신체는 휴먼스토리 형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소재다. 다시 말해, 말이 살이 된다.
우리는 고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각각의 구성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고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우리가 동물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식의 발단이 있다.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갈등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리고 결말은 드라마에서 갈등의 해소가 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동물의 소비.
고기 이야기는 종교적 유형론, 즉 신[동물]의 탄생, 죽음[절단과 분할] 그리고 부활의 형식을 따른다.
홀클로프트는 채식주의에 반대하면서 육식이 수많은 동물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고, 인간인 우리의 "평판"을 높여준다는 주장을 일간지에 게재한다. 이런 언급은 생명이란 것이 [신 또는 인간에 의해] 동물에게 부여되는 것임을 함의한다. 그리고 이런 생명을 부여하는 [신 또는 인간의] 자비의 문제는 육식가들이 육식을 옹호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되풀이해 주장하는 말 중 하나다.
호혜성이란 우리가 동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동물에게 부여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고기 이야기가 개념화되는 방식은 인간의 의지를 끊임없이 지시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동물들에게 실존을 허락하며, 동물이 우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식의 주체로 만들면서 동물을 주체에서 객체로 재배치한다.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탄생, 즉 우리 생명과 동화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고기는 오직 육식/소비를 통해서만 의미를 성취하며, 고기의 생산 과정 전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만약 고기 이야기를 통해 말과 살이 통합된다면, 우리는 신체가 바로 텍스트 그 자체이며 텍스트가 신체 그 사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동물을 원래 상태에서 음식인 고기로 변화시키는 것은, 텍스트를 원래 상태에서 좀 더 구미에 맞는 어떤 것으로 각색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과는 해체된 텍스트, 그리고 해체된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