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안에 든 한 마리의 개미가 되어
산채판이란 진품을 흉내냈지만 약간 다른 데도 있다는 점에서 진품에 대한 가품이라고 할수는 없고 말하자면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게 만든 제품이다.
쑨 거, <중국의 체온>, 24p
강렬한 제목으로 시강(시선강탈)하는 에세이집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의 저자는 ‘세상엔 수많은 지랄이 있고 그중 최고는 단연 돈지랄’이라고 했다. 심하게 공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를 휩쓸고 다니면서 그렇게 돈지랄을 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별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참 많이도 사들였다. 물욕 넘치는 ‘맥시멀리스트’였지만 브랜드를 따지거나 명품을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었기에 그쪽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디자인이 예뻐서 샀는데 친구가 알려줘서 알고 보니 명품 브랜드의 카피 제품이었던 적도 있었다. 아예 모르니 감별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스쳐 지나가던 청소 아주머니의 팔에서 나도 잘 아는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몽땡레어’.
아무리 브랜드에 무지해도 이걸 모를 수는 없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니, 어떻게 몽땡레어를 입고 계시지? 대륙의 스케일이란 이런 것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진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부잣집 아주머니가 소일거리를 하고 계신거라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분만이 아니었다. 친구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이모님도, 택시 기사 아저씨도 모두 그런 종류의 옷을 입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알게 됐다. 광활하고도 깊은 중국 ‘짭’의 세계에 대해!
친구를 졸졸 따라 (그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쇼핑몰에 갔다. 그녀는 지하 2층으로, 거기서도 제일 구석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런 곳에 뭐가 있을까 궁금증이 일던 찰나,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벽이 나타났다. 친구는 마치 신의 계시라도 기다리는 듯 그 벽 앞에 경건하게 서 있었다. 어리둥절하고 있을 무렵, '열려라, 참깨'의 주문을 외운 듯 담쟁이덩굴이 문의 형태가 되어 열려 버렸다. 그 안에는 가히 혁명적인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평소 명품에 관심 없던 나도 혹할 만큼 괜찮은 가격의 다양한 제품들. 베이징에 온 뒤 물욕이 사라졌다고 광고하고 다닌 것이 무색하게 구경하느라 정신 줄을 놓았다. 알고 보니 열려라 참깨의 담쟁이 가게 외에도 겉과 속이 다른 매장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가격이 천차만별인 만큼 질도 천차만별이다. 한 친구가 유명한 ‘바땡바오 프리즘’ 블랙을 사는데 자세히 보니 가방 아래쪽에 스크래치가 있어서 사장님께 이야기했다. 사장님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앞주머니에서 검은색 매직 펜을 꺼내 쓱쓱 칠하더니 가방을 다시 건넸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대륙의 흔한 A/S) 어떤 제품은 명품을 잘 아는 친구가 세심하게 봐도 진짜와 차이를 찾지 못할 만큼 품질이 좋다.
다이소와 비슷한 곳에 가보니 내가 평소에 쓰던 ‘조땡론’ 향수와 완전히 똑같은 제품이 있어서 신기해서 자세히 봤더니 끝에 ‘e’대신 ‘g’가 붙어서 ‘조땡론’이 아니라 ‘조땡롱’이었다. 메롱도 아니고 말롱이라니 이 눈부신 유머 감각을 어쩌란 말이냐. 향수 용기며 포장도 완전히 똑같아서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2011년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쿤밍에서는 짝퉁 애플 스토어가 22개나 적발됐고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베이징에 설계한 빌딩과 똑같은 모양의 쌍둥이 빌딩이 ‘충칭’에도 있으며 광둥성에는 오스트리아의 마을인 ‘할슈타트’를 그대로 재현한 공간도 있다. 이 정도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수준이다.
‘산자이(山寨)’는 산속의 오두막이라는 뜻으로 ‘수호전(水浒传)’에서 산적들이 기거하던 곳을 일컫는 말인데 지금은 중국산 가짜 브랜드나 ‘상품을 복제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국의 산자이 문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복제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닐 때도 많다. 중국 전기차 업체 ‘BYD’의 시작은 도요타와 비슷한 제품을 절반 가격에 만들어 파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1만 명의 종업원을 가진 자동차 제조사가 됐다. 애플과 매우 흡사한 디자인으로 독창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우수한 품질과 저렴한 가격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대륙의 실수 ‘샤오미’도 마찬가지다. 샤오미 제품을 한 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이 브랜드를 무언가의 모조품이라고 쉽게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산자이 문화가 단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제품의 형태로 발전시켜 나름의 성취를 만드는 점을 높이 사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거리에 온갖 명품들이 널려 있다 보니 진품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다. 명품에 대한 거대한 조롱에 직면한 느낌이랄까. 가끔 모두가 샤땡, 구땡, 몽땡레어 따위를 입은 세상에 대해서 상상하는데 그 상상의 결론은 모두에게 명품이 아니라 내게만 명품인 물건들을 찾아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나만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데 그곳이 어디인가 하니 바로 '타오바오(淘宝)'다. ‘뒤져서 살 도(淘’)에 ‘보배 보(宝)’를 쓰는 브랜드명만 떠올려봐도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그곳은 명실상부 '뒤지면 뒤질수록 보배가 끝도 없이 쏟아지는 보물섬'인데 정말 없는 게 없고 사지 않으면 손해인 것 같은 물건투성이다. 아무리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도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면 타오바오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학교 선생님이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타오바오를 ‘万能的淘宝(만능의 타오바오)’라고 부르며 '不怕买不到, 只怕想不到.’라는 말을 쓴다. 사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말고, (브랜드나 물건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뜻으로 당신이 떠올리기만 하면 타오바오에서는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상품의 다양성도 우수하지만 물건을 추천해 주는 시스템도 놀랍다. 엄청나게 쌓인 데이터베이스(DB)의 효과겠지만, 타오바오는 내가 ‘사고 싶어 했던, 혹은 사고 싶은, 혹은 사고 싶어 할’ 물건들을 다양한 공간에서 끈질기게 추천해 준다. 단순하게 내가 입력한 검색어로 물건을 추천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평소 소비 습관과 취향을 분석하고 나의 미래 관심사까지 예측하는 것 같다. 알리페이, 요오쿠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알리바바 생태계 독에 갇힌 우리는 한 마리 쥐, 아니 개미와 흡사하다. 그러니 그 개미지옥은 “너 이거 필요한 것 같은데?"에서 시작해서 “이래도 진짜 안 살래?”를 거쳐 “어차피 넌 곧 사게 될 거야” 따위의 환청이 들리는 세계다.
그러니 내 인생의 영원한 모토인 ‘자발적 가난’과 ‘더 많이 존재하고, 덜 소유하는 삶’은 귀국 후부터 시작해 보려고 하는데 요즘은 한국에서도 다들 손쉽게 타오바오를 이용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미니멀리즘은 다음 생부터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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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