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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Jun 13. 2024

심이를 처음 만났던 날들의 기록

육아라는 세계

절친이 만삭인 관계로 그때의 나를 소환해 보고 있다. 

12년 전의 나. 


그때는 제대로 기록할 기력이 없었기에 끄적이는 수준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웃긴 문장들이 많더라. 기록의 힘을 새삼 느낀다. 


출산에 대한 기록


30%가 진행된 후에 병원에 가겠다는 나의 완벽한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무너져 내 생일이 갓 지난 새벽 3시 30분 친정집 거실에서 양수가 터졌다. 양수가 터졌는데도 모르면 어떡하지 늘 고민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팡 소리와 함께 내 안의 작은 댐이 터졌다. 분만실 접수대에서 입원 수속을 하는데 <산모란>에 자신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덜덜거리며 쓰던 오빠의 손을 가만히 잡고 '그거 아니야' 했다.


진통이 진행되면서 나는 거의 울부짖는 한 마리 짐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딱 두 가지 생각만을 했다고 적었다. 


지옥 같은 열 두시간을 보내며 나는 

'내 아이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 지금을 견디고 있다'라는 생각

'우리 엄마도 나를 이렇게 낳았다'라는 생각 

딱 두 가지 생각만을 했다. 


그렇게 심이는 우리에게 왔다.

기적처럼.


마지막 문단도 인상적이다. 


13.1.5 이 날을 기점으로 당분간 내 인생에서 고독이 사라졌다. 


심이 탄생 35일 정도 됐을 때 글의 제목은 이랬다. 

끔찍한 모유 수유 


다른 산모들은 여유로워 보이는데 시간이 가도 나만 '수유 지진아'처럼 뒤처져 있다. 

심이가 가슴을 물면 온몸이 오징어처럼 자꾸 구겨졌다.


이때가 잠도 거의 못 자고 수유도 힘들고 제일 힘든 때였다. 

이 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아 정말 엄마가 되기란 힘들구나.

정말 너무너무너무 힘들구나. 


다음 날에는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들었나 보다.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된 모든 선배와 친구들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힘든 걸 어떻게 참았느냐고.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다들 정말 이렇게 엄마가 되는 건가?  


그 다음 날의 짧은 일기.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이 말을 쉽게 했다. 

육아에 관한 한 이 말처럼 진실한 게 없다.

흘러들었던 선배들의 이야기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마음에 꽂힌다. 


심이 탄생 두 달 정도... 이 시기가 진짜 힘들긴 했나 보다. 


행복하지만 너무나 지치는 하루하루.  

부모라는 이름은 견디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 


당시 심이의 작은 움직임으로도 깨는 나와 달리 

춘은 신기할 정도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나는 묘한 의구심을 가졌더랬다. 


아빠는 매우 잘 잠- ㅋㅋㅋ 신기하다, 이렇게 우렁찬 울음소리가 안 들린다고? 

춘의 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심이가 깰 지경- 흐흣 

그래, 아빠는 기저귀 값을 벌어야지. 얄미워서 볼을 꼬집어주려다 참는다. 


40일의 감회


결혼할 때 김주희 선생님이 해주신 '결혼은 날씨와 같아서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이 있다'라는 말씀은 육아에도 딱 맞는 것만 같다. 40일 동안 편한 날도 있었고,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날도 있었고 너무 힘들고 지쳤던 날도 있었다. 뭐 하나 넘긴 것 같으면 새로운 문제가 생겼고, 어제 잘 되었던 일이 오늘은 잘 안됐다.


그때 가슴에 새긴 문장은 이것이었군


자 어서 눕자. 이 책을 읽을 때에도 누워서 읽자.

내가 여러분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는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하다. 

앉을 수 있을 때 서 있지 말고 누울 수 있을 때 앉아 있지 말고, 잠잘 수 있을 때 깨어 있지 말라는 것이다.


-비키 로비니의 '엄마가 된 첫해를 살아남기 위한 지침서' 중


그 가을에는 응가를 많이 하는 심이와 함께 하다 이런 문장을...


육아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하루 아침에, 별안간, 한 생명체의 똥을 완벽하게 책임져야 하는 게 육아고 엄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루 아침'이 특히 중요하다. 어떤 연습도, 준비도 없이 닥쳐오는 거.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고 못할 거 같은데 하게 되는거.


춘 판박이인 심이는 참 순했다. 


사람들이 심이를 보면 두 번 놀라는데 첫 번째는 '남편이 회사 안 가고 왜 여기 있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이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울지도 않고 순하냐'라는 것이다. (2013.10.1)


기록을 읽다 보면 좋은 점은 가끔 과거의 나에게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우리 꽤 로봇 같고 현명했었네. 


<기계적이지만 따뜻한> 


오빠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늘 하는 대화가 있다.


"오늘도 심이 보느라 수고 많았지"

"아냐, 하루 종일 일하느라 오빠가 더 고생했어"


심이가 태어나고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갔을 시절, 하루 종일 미역국만 먹고 아기랑 씨름하는 내가 불쌍해서, 새벽 6시 30분에 출근하러 나가는 오빠가 안됐어서, 정말 진심을 담아 서로에게 하던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무미건조해지긴 했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빼먹지 않는다. 마치 대사가 단 하나밖에 없는 연극배우들처럼, 비슷한 대화를 매일 저녁, 매우 기계적이지만 따뜻하게 나눈다.


너무 지치던 어느 날에는 '그래 내가 오빠보다 힘들었다. 너는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동료들이랑 수다도 떨고 그래서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빠가 단 한 번이라도 도둑이 들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엉망진창 집에 눈살을 찌푸렸거나, 초능력으로 끓여둔 국이 짜다고 타박했거나, 떨어진 과자도 그냥 먹이는 육아의 위생상태에 대해 간섭했다면 나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오빠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문득 오빠도 어느 날에는 "그래 내가 너보다 힘들다. 넌 은재 자면 낮잠도 자고 책도 보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어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건 그것이 우리의 감정 마지노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남자,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육아. 아빠라는 이름으로 무거운 가장의 짐을 지게 하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엄마라는 역할을 주는 '아이를 키운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내가 더 힘들다'고 진정으로 생각하고 말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네가 뭘 알아, 해버리면 우리는 시속 180km 정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와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건 심이를 키우면서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주례사 대신 읽어주신 아빠의 편지에는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라는 글귀가 있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관계는 위험해지고 인생은 빈곤해지기 쉽다.


한 남자가 아버지가 되어 일을 하는 것, 한 여자가 엄마가 되어 육아를 하는 것, 가족들이 서로를 챙기고 사랑하는 것.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 


인생에서 그 무엇이 당연할 수 있을까. 


이 명제를 잊지 않는 한 오늘도 우리의 무미건조하지만 명랑한 대화는 계속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큰 시련 없이 살아온 내게 육아란 신세계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처럼 안되던 육아라는 굴레 속에 자책할 때도 많았지. 어느 날에는 유년 시절에 받았던 무수한 사랑과 상처들이 한 번에 나를 덮쳐온 순간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울고 있는 아이 옆에서 나도 엉엉 울어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지.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엄마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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