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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Jun 09. 2023

천장과 바닥 사이

조혈모세포 기증의 꿈


1.

한동안 검색창에 골수기증과 부작용이라는 키워드를 쳤다. (*요즘은 골수기증이 아닌 조혈모세포 기증이라고 부른다.) 2008년 춘이 헌혈을 하다 골수기증 신청을 했다는 것을 흘려듣듯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귀국한 지 일 년 만에 거짓말처럼 유전자가 일치하는 혈액암 환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국경이 폐쇄되었던 코로나 시절이었다면 난감했을 텐데 기막힌 타이밍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춘에게 처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덤덤한 척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니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혹시 발생할지 모를 부작용도 솔직히 걱정됐다. 골반뼈에 커다란 주사를 꽂고 괴로워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떠올랐다. 골수 추출 혹은 이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중압감도 있었다. 이식을 위해서는 조직적합성항원(HLA)이 일치해야 하는데 이는 세포 표면에 있는 단백질로 6번 염색체라고 한다. 항원이 일치하는 환자를 찾는 것은 2만 분의 1의 확률로 사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2.

사실 춘은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부정적 견해를 낸다 해도 그는 할 사람이다. 한국 조혈모 세포협회에서 보내온 자료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환자는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생명의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혹시라도 잘못 알고 있는 상식으로 인해서 주저함이 없으시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걱정이 아니라 응원과 공부였다.


협회에서 보내준 자료를 살펴보니 요즘은 예전보다 조혈모세포 추출이 훨씬 쉬워졌다. 과거에는 뼈 안 골수에 있는 조혈모 세포를 채취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한 쪽 팔의 혈관을 통해 나온 혈액에서 필요한 조혈모 세포층만 분리 채취하여 모으고 나머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은 다시 반대쪽 혈관을 통해 환자에게 바로 돌려주는 방식이다. 표면상으로는 4-6시간 동안 진행되는 아주 긴 헌혈의 형태다. 혈관의 상태에 따라 경정맥이나 쇄골하정맥, 대퇴부정맥쪽에서 채집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1박 2일에서 2박 3일의 입원 기간이 필요하며, 기증 후 공여자의 몸 상태와 혈액세포 생산 능력은 2-3주 안에 원래대로 회복된다. 부작용도 피곤함, 두통, 혈소판의 일시적 감소 등으로 경미하다고 한다. 1% 미만의 확률로 공기색전증 등이 발생할 수 있다. 기증 등록은 만 39세까지, 기증은 만 55세까지 가능하다.


조혈모세포 기증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후 기증 후기를 추가로 찾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조혈모세포 기증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들의 밝은 미소가 담긴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환자의 구체적인 정보는 알 수 없었지만 40대 남성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딱 하나만 생각했다. 그가 한 아이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것. 춘이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한 명이 아니라 한 가정일 것이다.


3.

정식 기증을 위한 추가 검사를 위해 춘은 한동안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술을 먹지 않았다. 4월의 어느 오후, 춘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갔다. (*조혈모세포 기증의 경우 회사에서 유급 휴가로 처리해 주는 것이 법규로 정해져 있다.)


5주간의 기다림이 이어졌다. 언젠가 들려올 소식에 대비해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것 외에 우리의 일상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이 기간에 나는 우연한 기회로 최근 혈액암을 이겨낸 허지웅 작가의 <살고 싶다는 농담><최소한의 이웃>을 읽었다. 평소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통찰력이 있는 솔직 담백한 문장은 마음을 움직였다. 짧지만 적나라한 투병 생활 기록 중 '그 밤'에 대한 묘사와 이후 삶을 바라보는 변화된 시선도 마음에 들었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최은희씨를 만난 이야기였다.


암치료 이후 허작가는 비슷한 병으로 투병 중인 환자들과 가족, 미래가 막막한 젊은이들에게 메일과 다이렉트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자신 같은 이십 대를 보내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된 그는 한동안 하루 종일 모든 메시지에 답을 쓰기도 했다. 메시지가 너무 많아 물리적으로 답변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자 사서함을 만들었다. 그와 최은희씨의 만남은 음성 사서함에서 시작됐다. 무뚝뚝한 경상도 억양의 청년이 울기 시작한다. 허작가와 같은 암인 림프암을 앓고 있던 최은희씨의 아들이다. 희망을 가지고 허작가와 같은 병원으로 옮겼다며 제발 엄마를 위해 병문안을 와달라고 한다.


세상 시니컬해 보이는 그가 병문안을 간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8층 병동에 자발적으로. 코로나로 단체 면담이 불가능해 최은희씨를 만나러 혼자 들어간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얼마나 기쁜지 알 수 있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한참 즐거운 수다를 떨고 나오며 그는 '이미 해체되었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달려와 옆에 있어주는 이 가족'에게 부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이 에피소드를 읽은 후 중환자실에서 낯선 사내의 방문을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을 최은희씨를 종종 떠올렸다.


그는 기준에 턱없이 부족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냥 좋은 일을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나는 평생 읽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글을 여러 번 읽게 됐다. 특히 언제나 내 편 같았던 천장과 바닥이 그렇지 않다는 걸 몸서리치게 느꼈던 절망적인 그 밤에 대한 글을.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을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을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4.

5월 말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환자와 춘의 유전자는 80% 일치하지만 환자 상태가 나빠져 당장 이식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시간을 계속 끌 수도 없어서 일단 가족이 이식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유전자가 80% 이상 일치하는 공여자를 찾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식하기로 마음먹은 춘의 결정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그의 가족들은 '중단'을 결정했을 것이다. 환자가 다시 이식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언제고 다시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통화는 종료됐다. 간절한 마음으로 2만분의 1의 기적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5.

천장과 바닥 사이에 존재하는 각자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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