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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 Oct 31. 2020

집에 구더기가 나왔습니다

방금 전 집에 구더기가 나왔습니다. 새집으로 이사온지 한 달째.
지금  상태는.. 글쎄. 눈 깜박이는 속도로 여기저기서 싸대기를 맞고 뻗었다면 이 정도 일까싶어요. 는 가끔 좀 많이 호들갑스럽습니다.

과거 장마철 베란다에 내놓은 양파에서 구더기가 생겼던 것을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처럼 한 마리씩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걸 본 적은 처음이에요.
새삼 느낍니다. 뭐든지 처음은 힘들어요. 

유난스레 벌레를 보면 뒤집어지는 성격인 저는 구더기를 보고 곧장 남편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 전화로 얻은 것은 근무 중인 그의 퇴근 시간이 아직 두 시간가량 남았다는 걸 확인한 것이었. 사람은 어리석어요. 알고 있으면서 이를 또다시 확인하고 확실하게 절망하죠. 확실한 절망만이 어리석은 희망을 끊어버려요.

남편 다음으로 옆옆옆옆 동네 즈음에 사는 친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의 현재 위치를 파악했고 긴급 상황에 우리 집으로 출동할 수 있는 나름 근거리에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화는 고작 구더기 때문에 늦은 저녁에 동생 집까지 올 생각이 없는 그의 마음을 확인시켜주는 또 다른 절망의 확인 전화였어요.

천장에서 한 마리를 더 발견하고 그러니까 총 세 마리의 구더기가(이미 한 마리를 힘들게 처치한 다음이었어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발견하고 결국 집 근처 카페로 피신을 왔습니다.

아,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두려움을 주는 그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닌데, 단지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도망이라니. 어리석은 걸 알지만 어리석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상사태거든요.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핑계로 밤에는 잘 마시지 않는 커피를 라지 사이즈로 시켰습니다. 놀란 가슴과는 달리 한 모금 마신 커피가 참으로 맛있어서 다른 무게감의 놀라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여기 라떼 맛집이네..  

고등학교 때 주택에 잠깐 살았었는데 그 집에는 돈벌레가 참 많았습니다. 그 집에 살던 기억 중 좋았던 기억은 참으로 드문데 기억의 상당수를 돈벌레가 장악하고 있어서. 그러고 보면 기억이라는 것은 순간의 감정의 강도가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돈벌레가 너무 괴롭고 두려웠던 어느 날은 돈벌레를 주제로 글을 쓴 적 있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던 밤 12시였.
제목은 '나는 왜 돈벌레를 무서워하는가.'
는 글에서 '인간은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익숙한 네발 동물을 넘어선, 그러니까 다리가 다섯 개 이상의 무언가에겐 공포를 느낀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네발과 두발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무서운 것 같아요. 세발의 무언가도 좀 무섭고 한 발도 무섭고 발이 없는 건 더 무서워요...
발의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늘 무언가의 처음은 무섭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두려운 것이겠죠. 거기서 오는 불쾌감은 굉장해요. 

의 친오빠는 전화를 끊기 전 다정하게 구더기에 맞서는 두 가지의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차분하게 젓가락으로 구더기를 집어서 도망가지 않게 테이프에 붙여 처리하라는 현실 불가능한 조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요새 별별 거래가 성립된다는 당*마켓에 올려보라는 것이었어요.

긴급/구더기 잡아주세요- 다섯 마리당 만원.  

전자보단 후자가 나을 것 같지만 정체를 모르는 낯선 사람이 구더기를 핑계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어째 더 두렵습니다.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무섭고..

는 태생이 쫄보임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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