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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투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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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 Jan 29. 2022

병원에서 야영하기

투병 4일 차

2022년 1월 21일 요 며칠 계속 흐림  


보호자 침대에 누워서 침상에 누운 환자 영을 바라본다. 입원 며칠 만에 영은 더 야위었다. 4개의 주사를 몸에 달고 힘없이 누워있는 영은 내가 싸온 보호자 짐을 보면 기가 찬다. 베개와 두 개의 담요, 책과 속옷, 화장품, 탭과 텀블러 2개(커피용과 물용), 귀마개, 안대 등 영의 짐 세배 가량은 되는 것 같다. 거기에 보호자 식이 비싸(보험 처리가 되지 않아 한 끼에 8,000원 이상) 끼니를 저렴하게 때울 컵밥과 햇반, 김치, 그리고 커피도 외부에서 사 먹으면 비싸니 카누까지 챙기다 보니 영의 사물함은 내 물건으로 가득 찬다.   

막혀하는 영에게 말한다.

엄마, 우리 야영온 거 같다. 그렇지?

여전히 기 막혀하는 영은 웃어버린다.

 

동물농장을 읽겠다며 가져갔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열페이지도 못 읽고 포기했다.

어제는 옆 환자 간병인과 싸움이 있었다. 이런 시정잡배 같은 싸움은 오랜만(?)이다.

우리 자리는 환자 침대와 보호자 침대 사이 공간이 비좁아 영의 수액걸이도 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문제를 살펴보니 우리 침대가 공간 활용을 제대로 못한 채 비뚤어져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옆 침대가 우리 공간을 '침범'한 상태였던 것.

 

뭐 이야기는 더 길지만, 간략히 설명하자면 우리 침대를 제대로 옮기니 자신의 자리가 좁아진 옆 간병인이 우리 커튼을 때리며(?) 괴성을 질렀고, 그러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싸움이라면 질색인데 맙소사)

 

내 엄마 영은 작은 체구에 평소 점잖은 사람이지만, 부당한 경우를 겪으면 결코 참지 않는 성정이다. 출산일기에도 썼던 것 같은데, 난 어린 시절부터 영을 바라보며 기자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해왔다. 예전에는(지금도 그러는지?) 시내버스 기사들이 정류장을 마음대로 지나치고 문도 제대로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가 되면 영은 버스기사의 잘못을 지적하며 부글거리는 마음으로 '고객의 소리' 엽서를 들고 내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꾹꾹 화를 눌러쓴 엽서를 버스 회사로 보내곤 했지.   

 

다시 간병인과의 싸움으로 돌아오면 영은 며칠 내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체력으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 간병인과 싸움 아닌 싸움을 시작했다.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  

그렇다면 그 옆에서 나는 무얼 했느냐?

나는야 살면서 그 어떤 말싸움에서도 1승을 올리지 못한 전적 0승의 워리어. 황당한 이 싸움의 시작과 여전사 영의 처음 보는 약한 모습에 분노가 치민 나는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본다.

결과는? 이런 황당한 싸움에 제대로 된 결론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나마 다행인 건 분노한 나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긴장해서 손은 떨렸지만 흑흑)  


창가 침대로 옮기니 숨이 조금 트이는것 같다.

병실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은 후 병원에선 영의 병실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꿔줬다. 창가가 보이고 기계 치료자가 없는 조용한 병실이다.

영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 간병인이 우리 좋으라고 싸움을 걸었나 봐. 뭐, 잘됐네. 아주 잘됐어.  

박수라도 치고 싶은 이 기분. 싸움을 걸어 준 간병인 덕분에 오늘 밤은 좀 더 쾌적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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