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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선영 소장 Feb 11. 2022

치밀하고 허술하고 치밀한 하루

카드지갑의 행방을 찾아라 

막상 2월이 되면 안다. 2월은 생각보다 추운 계절이다. 이번 달부터 소비를 파격적으로 줄이겠다고 결심했는데, 내년에 하나 사야지 하고 찜해 두었던 겨울 코트를 어젯밤 퇴근길에 하나 질렀다. 

'이 날씨를 좀 봐 아직 매우 춥잖아! 올해도 제법 입을 수 있겠어. 헤헤'

아이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지고 나는 나의 일상을 향해 집을 나선다. 아침 바람이 알싸하다. 하늘까지 눈이 시리도록 파란 걸 보니 드라이브 쓰루 커피 한잔이 당긴다. 라떼라면 더 좋겠다. 

'약속시간까지 여유도 있으니 주유도 하고 별다방에 살짝 들러봅시다.' 내가 나에게 제안을 하고 뭔가 체계적으로 짜여가는 나의 동선을 떠올려본다. 뿌듯한 마음이 한 스푼 피어오른다.     


운전하는 시간은 나의 최애 시간 중 하나다. 특히나 노을이 질 때, 특히나 배철수 아저씨의 음악캠프 혹은 이현우 아저씨의 음악앨범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면 운전하는 시간은 최애 중에 최애 시간이 된다. 식구 많은 가족. 장점도 너무 많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자발적 고독의 혜택을 놓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운전할 때만큼은 고독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린다. 그 시간은 마치 바에서 와인을 한잔 마시는 나를 연상하게 한다.

 

나를 기다리던 라테를 픽업해서 주유소로 간다. 익숙한 주유소도 아니고 카드 할인이 적용되는 주유소도 아니지만 용감하게 들어가 본다. 힘이 센 진공청소기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란 걸 이전에 봐 두었기 때문이다. 

'음. 차 내부를 한번 청소해주겠어! 음. 뭔가 생산적으로 흘러가는 하루야!'


적당한 주유기에 자리를 잡고 주유를 한다. 나는 딱 5만 원 딱 6만 원 주유하는 걸 좋아한다. 가득 주유를 하면 카드가 결제되었다가 취소되고 다시 결제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데, 뭔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연료 게이지를 보여주는 계기판에 살짝 여유가 생기는 것도 마음에 든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 

 

"앗 뭐야?"

주유 후에 힘이 센 진공청소기를 이용해서 차 내부 청소를 좀 하려고 했는데... 

세차를 한 고객만 진공청소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문구가 이제야 보인다. 그래도 기분은 여전히 괜찮다. 다음엔 주유를 하고 세차를 하고 청소까지 풀코스를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패에서 배우라는 명언을 아침에 본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실패에서 배우고 있다 으하하. 주유를 시작하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를 잘 받지 않지만 이 전화는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느낌이 그렇다면 받아본다.  

"여보세요?"


역시나 받아야 하는 전화였다. 코칭받는 고객의 소개로 새로운 분이 전화를 주셨다. 상대방의 공간이 배우 시끄러운 듯 느껴졌지만 집중해서 중요한 용건을 무리 없이 나누었다. 주유를 마치고 카드를 챙기고 출발한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조수석에 두었던 가방을 챙긴다. 주유에 사용한 카드를 카드 지갑에 넣자 싶었는데 어허 카드지갑이 없다. 뒤통수가 서늘하다. 카드지갑을 단번에 찾지 못하는 일이 가끔 발생하기 잠 결국 찾게 되는 순간에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데 불안하다. 


가방을 다 뒤져도 카드지갑은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 옆 컵홀더를 두는 자리 운전석 아래까지 꼼꼼히 찾아보아도 그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 되면 어딘가 있을 거야 내가 챙겨 왔을 거야 라는 확신이 물러진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카드지갑을 어디에 흘린 것을 인정한다. 인정하고 나면 결정을 해야 한다. 분실로 처리할 것인가 찾아 나설 것인가 고민하다 쿨하게 놓고 싶은 마음을 다잡는다. 찾아 나서자. 생각해보니 신분증이 들어있는 카드지갑이다. 


주유소로 다시 간다. 주유했던 자리를 면밀하게 다시 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는 카드지갑의 행방을 물어볼 수 있을까 사무실로 들어가 본다. 점심을 드시다 나오시는 듯 보이는 사장님 부부 미안하지만 여쭤본다. 여기까지 찾아 나선 나의 용기를 도와주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사장님 부부는 고맙게도 CCTV를 들여다보자고 하신다. 짜증을 내는 기색이 없으셔서 다행이다. 주유한 시간을 확인하고 CCTV를 찾아보신다.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조금 더 나의 행동을 더듬어 보면서 차 위에 카드지갑을 놓고 주유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말을 듣고 사장님이 지갑을 찾는다. 


"차 위에 카드지갑을 놓고 주유하신 게 맞네요. 주유를 하면서 전화를 받고 주유 후에 다시 차를 타고 출발하시는데... 어허 지갑은 그대로 두고 타셨네. 주유소 나갈 때까지 지갑은 거기 있어요 안 떨어지고"

"아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거 확인한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네요. 식사 방해해서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아직 카드지갑을 찾지는 못했지만 잃어버렸던 동선의 일부를 찾았다. 주유소 사무실을 나와서 내 차가 1시간 전에 이동했을 동선을 떠올리며 가만히 그 동선을 주시해본다. 그렇게 나는 카드지갑의 최종 동선을 찾을 수 있었다. 주유소에서 도로로 나가는 지점에 떨어져 있는 아이. 도로도 검은색 카드지갑도 검은색이었지만 분명히 내 카드지갑이 맞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타이밍에 카드지갑을 데려온다. 지갑 안에 들어 있던 3장의 카드가 모두 들어있다. 바퀴 자국이 여러 개 카드지갑 위를 지나갔구나. 신용카드 1장, 체크카드 1장은 압력에 의해 깨졌다. 다행히 운전면허증은 무사하고 수습하러 와 준 내가 대견스럽다. 이제 분실신고 말고 분신 훼손 재발급 신고를 하면 끝이네. 같은 카드 재발급 같지만 느낌은 매우 다르다. 그걸 오늘 또 느낀다. 오늘 참 나는 치밀하고 허술하고 또 치밀했어. 나를 책임져 주는 나에게 고마운 하루. 그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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