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선영 소장 Mar 08. 2022

지구에서 가장 신나는 시한부

우리에게 안정보단 중요한 것

그녀는 췌장암 말기다. [서른, 아홉] 드라마에 등장하는 찬영씨. 전미도 배우가 맡은 극 중 역할 찬영은 배우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연기 선생님을 하고 있다. 드라마는 마흔을 앞에 둔 세 친구의 우정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그녀의 나이도 서른아홉이다. 안식년을 가지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고 싶다는 친구 손에 이끌려 찬영은 건강검진을 받는다. 그리고 천둥 같은 선고를 받는다. 천둥 같은 선고는 본인과 친구들 모두의 일상을 탄식과 눈물로 버무린다. 번뇌와 좌절을 제법 겪어내고서야 그녀들은 결심한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어차피 보내야 할 길이라면 질질 짜지 않기로. 


어차피 가야 할 길 질질 짜지 않겠다는 결심은 '지구에서 가장 신나는 시한부'가 되어보자는 각오로 이어진다. 시한부(). 시간에 한계가 더해진다는 의미일까? 시간의 한계를 가진 삶. 누구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의사 선생님으로 부터 자신의 삶이 진짜 유한하다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마음은 다르리라. 


'선생님 제가 말기 암 환자라고요?

"그럼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는 건가요...?'

'앞으로 길면 6개월입니다.' 


인간 내면에는 부정하기 힘든 욕구가 존재한다고 배워왔다.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Harold Maslow)는 이를 ▲신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기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로 나누어 제시했고 나도 삶 속에서 그 욕구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며 살아왔다. 


매슬로우 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이야기, 시한부의 신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를 시한부라는 단어로 바꾸어 본다. 시한부에게 기본적인 욕구란 무엇일까? 아니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각별한 존재인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우리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야기 나누고 채워가야 할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시한부 선고받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는 다른 것일까? 


남편이 암 진단을 받은 친구가 있다. 덤덤하게 전화로 그 소식을 전하는 친구를 보며 덤덤해서 더 속상한 게 이런 거구나 느꼈다. 친구의 남편은 화장실을 점점 더 자주 가고, 화장실에서의 통증이 점점 더 커져간다고 했다. 바쁘고 귀찮지만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던 며칠 후 받은 전화였다.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친구를 만나는 날, 우리의 행동과 대화는 여전했다. 근황을 나누고 공감하고, 크게 공감하고, 웃고, 크게 웃고, 분식집에서 여러 메뉴를 나눠먹고 티타임을 가졌다. 


친구의 근황 중에 남편과의 부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금슬이 좋았던 부부였지만 암 진단을 받고 어떻게 안아주고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건 오버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여전히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조심해서 먹고, 안정을 취하라는 이야기만 듣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6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생각이 났다. 폐암 걸리셨던 어머님은 대형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실수록 기운을 잃어가셨다. 더 이상 해 드릴 치료가 없다는 말을 듣고 옮긴 호스피스 병동에서 누워만 계신 어머님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머님께 남은 삶은 어때야 할까?'


어머님이 먼저 특별한 말씀을 꺼내지는 않으셨다. 그저 어머님을 가만히 바라보면 슬쩍 마음이 보였다. 천주교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어머님은 마음이 많이 편안해지신 듯 보였다. 가끔 들려오는 기도 소리와 성가 소리를 가만히 들으실 때면 표정이 잠깐잠깐 화사해지셨다. 옆 방에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다녀가시면 부러워하시는 눈치셨다. 어머님이 보여주신 힌트를 따라 나는 어머님이 기도받으실 수 있도록 기도하실 수 있도록 세례 받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마음이 편안해지시니 오빠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님의 작은 오빠셨는데, 나는 결혼 15년이 넘도록 뵌 기억이 없었다. 아버님께 물어보니 유년시절에는 남매 사이가 각별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각자 결혼을 하고 나서 큰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이가 좋았던 남매는 그렇게 30년 이상 연락을 두절하고 지내셨다. 그분께 전화를 드렸다. 번호를 알아내는 일도 전화를 드리는 일도 생각보다 쉬워서 씁쓸했다. 30년 이 쉬운 길을 일부러 가지 않으셨구나. 마음이 아예 없었을까 생각하면 그럴 리 없다. 마음은 있었으나 여전히 삶이 제법 남아 있다고 여기셨던 어머님과 어머님의 작은 오빠가 서로의 연락을 바라는 것도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세월을 그렇게 오래 보내왔다. 


결국 두 분은 만났다. 어머님이 떠나기 몇 주 전 어머니의 작은 오빠는 씩씩한 얼굴과 건장한 체격으로 오셔서는 긴 시간 어머님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우셨다. 어머님의 표정은 그날 이후 더 가벼워지셨다. 어머님의 남은 여생은 두 가지 도전을 통해 조금 더 평온함에 가까워졌다. 어머님은 지구 상에서 가장 평온한 시한부가 되고 싶으셨구나 느껴졌다.


나에게 그 질문을 돌려본다. 

"내가 시한부라면, 나는 어떻게 남은 삶을 채우고 싶을까?" 

남편에게도 그 질문을 돌려본다. 

"남편이 시한부라면, 그이는 어떻게 남은 삶의 시간을 채우고 싶을까?"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친정엄마에게도 그 질문을 돌려본다. 

눈이 뜨거워진다. 눈물이 흐른다. 전화라도 다정하게 받자 큰 딸아... 후회가 밀려온다.          


매슬로우의 이야기를 빌어오려고 그의 생애를 찾아보니 몇 가지 지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는 점 

- 어린 시절 매슬로는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성격에 겁도 많았다는 점

-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점

-  자기애적 성향이 강하고 흑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어머니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점

- 친구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책에 묻혀 지냈다는 점

- 부모의 권유로 뉴욕 시립대학을 들어가 법학을 전공한 매슬로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

- 1927년 코넬대학교로 옮겼지만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다는 점


인류에게 큰 지혜를 전해준 누군가의 인생경로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좋은 기회다. 비범한 사람들 조차 평탄하고 순조로운 인생이란 없음을 볼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과 후회가 적은 삶으로 나아갔던 그들의 단단한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분명하다. 삶이란 유한하다. 나에게도 나의 소중한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삶은 유한하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기로 한다. 그리고 느껴본다. 나 역시 지구 상에서 가장 신나는 시한부가 되겠다는 마음을. 이제 그 마음으로 또 하루를 채우러 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콩이라면 나는 어떤 콩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