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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선영 소장 Mar 22. 2022

44여, 나의 최애 시간들

호호 할머니가 될 나에게 주는 선물꾸러미 

나는 해 질 녘이 좋다. 그때는 아마도 하루를 정리하고 중요한 일을 잘 마쳤을 시간이다. 아침 일찍 출발했을 집으로 운전을 하며 돌아오는 시간이 좋다. 이때 저 멀리 보이는 산 혹은 고층 아파트 사이로 붉은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 겹친다면 마음이 더없이 좋다. 그 시간만큼 마음이 차분해지고, 겸손해지고, 하루에서 얻어진 교훈들을 되새긴다. 그리고 내일을 시작하는 작지만 중요한 각오를 다지기 좋은 시간이다. 그때 차 안 라디오에서 배철수 아저씨의 음악캠프 시그널이 흘러나온다면 나는 더 행복하다.


나는 만년필이 좋다. 우연히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만나게 되는 순간 나는 무척이나 반갑다. 부담 없는 가격이라면 구입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 좋다. 구입한 만년필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찾고, 차 옆자리에 얌전히 두고 집으로 데리고 오는 시간도 좋다. 만년필이 옆자리에 타 있을 때는 평소보다 조심성 있게 그리고 상큼한 모션으로 운전을 해본다.  


만년필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는 손을 씻고 다른 구입품들을 정리하고 옷을 다 갈아입고, 정갈한 곳에서 만년필을 개봉하는 시간도 좋다. 만년필의 포장을 제거하고 몸통을 살포시 열어 잉크를 주입하기 위해 잉크 통과 만년필의 바디를 제대로 연결하는 섬세한 시간도 좋고 결국 탁 소리를 내며 만년필이 쓸 준비를 다 마치는 시간도 좋다. 아 맞다 하나 남았지 하면서 잉크가 제대로 나올 때까지 가지런한 방향으로 나오지 않는 만년필을 스케치하며 준비운동을 하는 시간도 좋다. 


지난주 아이들과 방문한 다이소에서 가져온 검은색이나 카키빛이 살짝 도는 2자루에 천원인 이쁜 만년필을 데리고 와서 한 자루는 관심을 보이는 큰 아들에게 주고 남은 한 자루는 화요일 금요일마다 쓰기로 약속한 에세이. 이번 주 글감을 정리해 본다. 이 시간이 나는 참 좋다. 이럴 때 저스틴 비버의 음악이 흘러나온다면 나는 120% 더 좋다. Off My Face, Love Yourself ... 내가 만년필과 함께 행복한 시간, 그 시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목소리와 선율이다. 


나는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만나는 나의 밑줄이 좋다. 예전에 내가 그어둔 밑줄을 지금의 내가 읽고 묵상하는 시간이 좋다. 특히나 책장 제일 위칸에 모아둔 평생을 두고 자주 읽고 싶은 책들. 그 아끼는 책들 속에 내가 그어둔 밑줄을 만날 때 나는 위로와 지혜를 얻는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처음 겪어 보는 일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나를 위해 미리 그어둔 지혜와 조언이 담긴 밑줄이라고 해야 할까. 지혜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날이라면 선한 진동을 줄 수 있는 그 한 줄을 찾아본다. 그 시간이 나는 참 좋다. 밑줄 그었던 그날의 나와 그 밑줄을 다시 음미해야 하는 오늘의 내가 만나는 시간이 참 좋다.     


마음에 숨어있는 확신을 소리 내어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배라도 항해 도중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운항하게 된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배가 지나간 물길을 바라보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직선 형태를 나타낼 것이다. 


Ralph Waldo Emerson의 자기신뢰 중에서>


나는 추어탕이 좋다. 몸에 좋다는 음식 중에 내 몸이 무리 없이 잘 흡수하는 음식이라는 경험이 쌓여서 좋다.  메뉴로만 보면 복어 라면 더 좋겠지만 추어탕은 혼자서도 찾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편안함이 더해져서 좋다. 몇 년 전 선릉역에서 미팅을 했다. 점심때를 놓쳐 오후 3~4시경이 되었고, 그때 눈에 띄던 추어탕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참 조용했다. 주인분도 직원분들도 왠지 모르게 조용하고 담백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주문한 추어탕이 나오고 천천히 추어탕을 먹는다. 튼실한 부추가 더불어 나왔고 밥은 돌솥밥이었다. 찬으로 낙지젓, 오이 고추가 함께 나왔다. 천천히 몸에 기운이 차오름을 느끼면서 한 30분은 먹었나 보다. 기운 빠지는 일이 있던 날인지 축하할 일이 있던 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난 그날 추어탕 한 그릇으로 위로도 얻고  축하도 얻은 듯했다. 


나는 딸들과의 대화가 좋다. 엄마가 행복한 시간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날 한가해 보이는 딸이 보이면 다가간다. 

"엄마가 행복해지는 시간에 대해 쓰려고 하는데, 딸이 볼 때 엄마는 언제 행복해 보여?"

"음 그러게..." 


5학년 딸이 생각을 시작하는 저 추임새도 너무 좋다. 중학생 딸이라면 귀찮아하거나 여러 차례 

구슬리고 구슬려야 했을 텐데 아직 작은 딸은 순수한 대화가 가능하다. 


"엄마는 웬만하면 다 행복해 보여!" 

제법 감사하고 제법 무성의한 대답을 듣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좋다.


"우리 딸은 언제가 제일 행복할까?"

"음 세가지만 말해볼까요?"

"좋지요."

"하나. 엄청 귀여운 것을 봤을 때, 둘. 바람이 부는 곳에 갔을 때, 셋. 칭찬을 받았을 때"

"다른 건 충분히 알겠어요. 칭찬이라 함은 어떤 칭찬일까? 이쁘다 귀엽다?"

"아니요. 외모 말고 실력에 대한 칭찬이요. 수학 실력이 좋아졌다. 숙제나 발표를 너무 잘했다 뭐 이런 거"

"아하 그렇구나 시현이는 실력에 대한 칭찬이 외모에 대한 칭찬보다 더 기분이 좋구나!"


 딸과 함께 서로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 나는 순간이 참 좋다. 그래서 결심한다. 기억력보다 추진력이 좋은 나에게, 과거를 떠올릴 여유보다 현재를 살아나가야 할 분주함이 많은 나에게 미리 선물을 준비해 두기로 한다. 이 준비는 나중에 내가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 누리게 될 복지로 쌓여갈 것이다. 호호 할머니가 된 내가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빙그레 웃으며 먹을 수 있는 '추억의 알사탕'.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만들어 두려 한다. 그렇게 마음은 곧 실천으로 옮겨본다. 어떻게?... 


소소하지만 행복한 나의 일상을 섬세하게 꾸준히 기록해 두기로 한다. 호호 할머니가 될 나에게 주는 추억이 담긴 선물 꾸러미!호호 할머니가 될 나에게 주는 선물꾸러미  호호 할머니가 될 나에게 주는 선물꾸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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