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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맥타 Sep 27. 2018

음악평론가 슈만, 그리고 <카니발, Op.9>

19세기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아름다운 리트 작품과 클라라와의 러브스토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슈만은 생전에 작곡가가 아닌 음악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로베르트 슈만(1810-1856)


평론가로서 슈만은 쇼팽,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브람스 등 동시대 작곡가들을 평가하고 발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아마도 그의 첫 공식 평론일 것이다. 1831년 12월 7일에 발행된 《보편음악신문》(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에 실린 슈만의 평론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저녁, 화자 율리우스와 플로레스탄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이때 오이제비우스가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신사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 다음 두 사람 앞에 악보 하나를 펼쳐 놓는다. 오이제비우스가 펼친 악보는 쇼팽의 <돈 조반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이다. 당시 독일에서 쇼팽은 아직 무명의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슈만이 율리우스라는 필명과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인물의 입을 빌려 그를 칭송하며 독일의 대중에게 쇼팽의 이름을 알린 것이다.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슈만은 뜻이 맞는 지인 몇몇과 함께 《신 라이프치히 음악잡지》(Neue Leipziger Zeitschrift für Musik)를 발간한다. 이때만 해도 슈만은 주요 편집자 중 한 명일 뿐이었지만, 발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적인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직접 발행인이 되어 간행물의 명칭을 《신음악잡지》(Neue Zeitschrift für Musik)로 변경하고 이후 10년 간 단독으로 이 잡지를 발행한다. 바로 이 《신음악잡지》 안에 평론가로서 슈만의 수많은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38년 9월 28일에 발행된 《신음악잡지》


《신음악잡지》의 주요 필진은 일명 ‘다비드 동맹’의 일원들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앞의 비평문에 등장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였는데, 사실 이들은 슈만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들이었다. 그의 첫 평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슈만은 마치 소설을 쓰듯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음악을 평하곤 했는데, 이를 위해 허구의 인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정확히 말하자면 슈만이 가진 양면적 성격에 각각 다른 이름을 부여한 것이었다. 슈만의 내성적 성격을 대변하는 오이제비우스는 창백한 피부에 차분하고 신중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슈만의 적극적인 면을 대변하는 플로레스탄은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열정적이고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오이제비우스(왼쪽)와 플로레스탄  -  <카니발, Op.9>의 발레 공연을 위한 의상 스케치 (20세기 초)


《신음악잡지》에서 슈만은 편집장으로서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한편,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이름으로 음악에 대한 대조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때로는 이들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마이스터 라로(Meister Raro)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라로는 슈만의 피아노 스승이자 미래의 장인인 프리드리히 비크를 모델로 만든 인물이었다.) 또한,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가명으로 언급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F. 메리티스(F. Meritis)로, 비의 딸이자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으며 훗날 슈만과 결혼을 하는 클라라는 질리아(Zilia), 칠리아(Cilia), 키아라(Chiara) 등으로 지칭했다.       


슈만은 참된 예술의 정신이 결여된 당시의 음악계를 개혁하고자 했다.


훗날 슈만은 다비드 동맹이 오로지 자신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모임이었다고 밝히면서 음악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고자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할 가공의 인물들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이렇게 가면을 바꿔 써가면서 글을 썼던 이유는 대중적 취향에 부합하는 음악만을 만들려는 속물적인 작곡가들을 비판하고 참된 예술의 정신이 결여된 당시의 음악계(이는 슈만의 개인적 의견으로 필자의 견해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를 개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슈만은 다비드 동맹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직접 작곡한 것처럼 이들의 이름으로 자필보에 서명을 하거나 음악으로 이들을 묘사하기도 했다. 전자의 예가 <다비드 동맹 무곡집, Op.6>과 <피아노 소나타 1번, Op.11>이고 후자의 예가 <카니발, Op.9>이다. 음악평론가로서의 슈만을 염두에 두었을 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카니발>이다.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 Op.11> 악보 표지 - 작곡가 이름으로 "Florestan und Eusebius"가 적혀 있다.


<카니발>은 슈만이 한창 《신음악잡지》의 발행에 집중하던 시기에 작곡한 피아노 독주곡으로, 20여 곡의 소품을 통해 상상 속 카니발의 현장을 묘사한다. 가면을 쓰고 정형화된 캐릭터로 분장해 즉흥 연기를 선보이는 유랑 희극단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인물들(피에로와 아를르캥, 판탈롱과 콜롱빈)이 등장하는 한편, 왈츠, 산책, 휴식 등을 묘사한 음악이 카니발의 분위기를 표현한다.      


다비드 동맹의 일원들도 카니발을 즐기고 있다. 오이제비우스는 아다지오 템포와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고요하고 차분하게 표현되고, 플로레스탄은 휘몰아치는 듯한 음형과 열정적이고 변덕스러운 분위기로 오이제비우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비크를 상징하는 키아리나, 당시 슈만의 약혼녀였던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을 상징하는 에스트렐라, 슈만이 음악가로서 높이 평가했던 쇼팽과 파가니니도 등장한다(슈만이 어떻게 쇼팽과 파가니니의 음악을 모방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들어보는 것은 이 작품을 감상하는 또 다른 재미다).      


콜론나 광장의 카니발 (Jan Miel, 1645)


이렇게 연극 속 캐릭터들과 슈만이 동경하는 작곡가들,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 키아리나와 에스트렐라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실존 인물들이 모두 모인 상상의 카니발은 마치 슈만이 다비드 동맹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만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다비드 동맹원들의 행진이 <카니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카니발>이 음악평론가 슈만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작품인 이유가 바로 이 마지막 곡에 있다. 마지막 곡 ‘필리스틴에 대항하는 다비드 동맹의 행진’에서 다비드 동맹원들은 ‘17세기의 주제’(라고 악보에 적혀 있다)에 대항해 음악적 투쟁을 벌인다. ‘17세기의 주제’로 인용된 선율은 독일어권 지역의 민속음악인 ‘할아버지의 춤’으로, 전통적으로 무도회장에서 마지막 춤을 출 때 흘러나오는 음악이기도 했다. ‘필리스틴에 대항하는 다비드 동맹의 행진’에서 이 선율은 필리스틴, 즉 슈만이 비판하는 교양 없는 속물들의 진부하고 구시대적인 음악을 상징한다. 슈만은 이 선율을 인용한 뒤 승리에 찬 분위기로 곡을 마무리함으로써 다비드 동맹원들이 행진을 하며 필리스틴을 몰아내는 현장을 묘사한다. 이렇게 지면 위의 투쟁은 악보 위의 투쟁으로 전환되고, 작곡가 슈만의 작품 안에서 음악평론가 슈만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론가 슈만을 음악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 <카니발>을 들어보자.


Robert Schumann - Carnaval, Op.9
https://www.youtube.com/watch?v=iSUFfrnJIgI

▸Préambule  

▸Pierrot

▸Arlequin

▸Valse noble

▸Eusebius

▸Florestan

▸Coquette

▸Réplique

(Sphinxes)

▸Papillons

▸A.S.C.H. – S.C.H.A: Lettres dansantes  

▸Chiarina

▸Chopin

▸Estrella

▸Reconnaissance

▸Pantalon et Colombine

▸Valse allemande  

▸Intermezzo: Paganini

▸Aveu

▸Promenade  

▸Pause

▸Marche des Davidsbündler contre les Philistins


 



작곡가 슈만의 첫 작품이 궁금하다면 클릭 ↓
https://brunch.co.kr/@poulai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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