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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맥타 Jan 24. 2019

슈베르트의 <마왕>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은 파국이라고

본격 SKY 캐슬 헌정 4부작 <1>

가곡 <마왕>(Erlkönig)은 괴테가 쓴 동명의 시를 가사로 삼아 슈베르트가 작곡한 독창곡이다. (무려 만 18세에그 나이에 나는 무얼 했나… 반성해봅니다.) <마왕>의 가사, 그러니까 괴테의 시에는 아버지와 아들, 마왕, 그리고 해설자가 등장한다. 먼저 해설자가 폭풍이 휘몰아치는 깊은 밤, 병든 아들을 품에 안고 말을 달리는 한 아버지가 있음을 설명한다. 아들은 무시무시한 마왕이 있다고, 마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냐며 아버지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아버지는 그저 안개일 뿐이라고, 바람 소리일 뿐이라고 아이를 안심시킨다. 마왕은 “나와 함께 가면 나의 딸들이 너를 위해 춤을 추고 노래를 해 줄 것이란다,” “사랑한다,”라며 달콤한 말로 아들을 유혹하다가,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마왕이 데려가려는 곳은 죽음의 세계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떠는 아들을 안고 서둘러 말을 달리지만, 해설자가 다시 등장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설명한다. 


괴테의 <마왕>을 묘사한 프레스코화(Carl Gottlieb Peschel)


이러한 내용을 알고 보면 한층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가 있다. 한 달 전 개봉한 영화 <마약왕>과 엄청난 인기를 끌며 종영을 향해 가고 있는 드라마 <SKY 캐슬>(스카이캐슬)이다.    

  

<마왕>과 제목마저 유사한 <마약왕>(게다가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소오름...)에서는 이 음악이 극의 절정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저택에 홀로 남은 이두삼이 스스로 약을 주사한 뒤, <마왕>의 전주가 흘러나온다. 이 피아노 전주는 쉴 새 없는 말발굽 소리를 표현한 것으로, 피아노의 왼손 파트에서 특징적인 선율이 반복되는 동안 오른손 파트에서는 옥타브 병행이 ‘다다다 다다다 다다다 다다다’하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 반주가 어찌나 긴박하게, 어찌나 집요하게 반복되는지, 음악학자 타루스킨이 슈베르트의 <마왕>은 피아니스트의 오른팔을 희생시켜 추진력을 얻는다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슈베르트의 <마왕>, 피아노 전주


이 반주는 그만큼 듣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부분이고, 슈베르트의 <마왕>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소리이기도 하다. 이 곡을 아는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전주만 살짝 나와도 아하! 하고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마왕>의 전주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이두삼이 방으로 걸어 들어올 때, 그가 곧이어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것을 음악이 미리 말해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두삼은 마치 무언가가 보이고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계 어린 눈으로 총을 들고 집안 이곳저곳을 살핀다. 마치 마왕의 모습을 보고 마왕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떠는 아이처럼. 




<SKY 캐슬>에서는 가곡 <마왕>이 여러 회차에 걸쳐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마왕>은 김주영이 귀가한 뒤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서도 역시 전주가 부각된다. 음악은 김주영이 아이들을 부모의 품에서 떼어 내어 집어삼켜버리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김주영이 혜나에 대해 알고도 집에 들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한서진이 알게 되는 장면에서도 <마왕>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시청자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김주영이 악랄한 표정을 드러낸다. 김주영이 예서를 데리고 있겠다고 통보할 때는 <마왕>의 전주가 변형되어 등장한다. 괴테의 마왕이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듯, 김주영도 예서의 볼을 만지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마약왕>에서 이두삼이 마왕에게 시달리는 아이였다면, <SKY 캐슬>의 김주영은 마왕 그 자체다. 그동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며 회의감을 가지던 조 선생이 김주영에게 좋은 집을 선물 받았을 때, 한서진이 빼돌린 중간고사 시험지를 넘겨받을 때도 슈베르트의 <마왕>이 흘러나온다. 음악은 그것이 마왕이 내민 유혹의 손길이라고, 그 손을 잡으면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조 선생과 한서진은 마왕의 유혹에 넘어갈 것인가!)


김주영은 나아가 괴테의 <마왕>의 토대가 된 북유럽의 전설 속 인물과도 연결된다. 괴테의 시는 북유럽의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인데,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새벽에 한 남자가 말을 달리던 중 요정 아가씨들을 만난다. 요정들은 함께 춤을 추자며 남자를 유혹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내일 결혼을 할 몸이라며 이를 거부한다. 그러자 질투와 복수심을 느낀 요정들이 그를 응징한다. 응징의 방법에 관해서는 남자를 병들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칼로 찔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쨌거나 남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만, 병 혹은 상처로 인해 결국 숨을 거둔다. 


<초원의 요정들>(Ängsälvor) - 주로 북유럽의 신화와 설화를 소재로 삼았던 스웨덴 화가 닐스 블롬메르(Nils Blommér, 1816–1853)의 작품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 김주영은 질투심인 것 같기도 하고 회한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한, 아무튼 어떤 그런 파괴적인 감정으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부모들을 자기와 똑같은 처지로 만들어버리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천벌 받을 년”이라고 말한 우주 엄마에게는 “너도 영영 나오지 못할 지옥불에서 살아봐”라고 말하며 대놓고 복수심을 드러낸다. 아이를 유혹해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왕의 이미지에 더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북유럽 전설 속 요정의 이미지까지 김주영이라는 인물 안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주영에게는 정말로 아픈 자식이 있다. 김주영이 오로지 타인의 파국을 향해 달리는 마왕인지, 마왕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아이를 안고 달리는 어머니인지는 끝까지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음악을 다루는 매거진이니 아무래도 음악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슈베르트는 마왕을 통절형식으로 작곡했다(갑자기?). 애국가처럼 1절부터 4절까지 모든 절을 같은 선율에 맞춰 노래하도록 만드는 것을 유절형식이라고 하는데, 통절형식은 그와 달리 모든 절에 다른 선율을 붙인 음악을 말한다. 슈베르트는 가사의 성격에 맞게 음악의 형식을 선택하곤 했는데, <마왕>의 경우 스토리의 극적 전개와 네 인물의 서로 다른 성격을 음악으로 명백히 표현하기 위해 통절형식으로 작곡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왕>에서는 화자가 바뀔 때마다 음악의 성격이 계속해서 바뀐다. 어린 아들의 목소리는 높은 음역과 불안정한 음으로 표현되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은 음역과 확고한 진행으로 안정감을 준다. 아이를 유혹하는 마왕의 선율은 아름답고 달콤하며, 도입부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해설자의 목소리는 중간 음역에서 중립적으로 표현된다.      


슈베르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각 인물의 목소리에 변화를 준다. 아들의 목소리는 공포감이 커지면서 점차 높은음으로 올라가며 불안해지고, 아이를 유혹하다가 인내심을 잃은 마왕이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가겠다며 화를 낼 때는 음악도 화를 낸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설명하던 해설자의 목소리도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면 감정적으로 변한다. 부자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말발굽 소리가 느려지다가 멈추고, 해설자가 마치 말을 하듯 “그의 품속에서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다”라고 읊조리면 음악이 끝난다. 유절형식으로 작곡했다면 이토록 극적인 음악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약왕>이나 <SKY 캐슬>에는 다른 음악이 삽입되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마왕은 독창곡이기 때문에 성악가 한 명이 마치 ‘다중이’처럼 혼자서 네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 실제로 연기력이 좋은 성악가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독일어를 알지 못해도 성악가가 어느 인물을 노래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래 영상이 바로 그런 예인데, 불안한 표정으로 (성악가 입장에서) 왼쪽을 보면 아들, 타이르는 듯한 표정으로 오른쪽을 보면 아버지, 앙큼한 표정을 지으면 마왕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확인해보자.        



아래는 <마왕>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네 사람이 나누어 부르는 영상이다.      




슈베르트가 <마왕>과 같은 해에 작곡한 유절형식 가곡이 궁금하다면 아래를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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