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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Feb 02. 2024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상상한다.

과각성과 내가 숲속에서 곰과 마주칠 확률

언젠가는 이 주제에 대한 글을 꼭 써보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분명 나만 이런 증상(?)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이 있다. 그간 스스로도 너무 납득이 가지 않는 버릇이라 언젠가 기회가 닿는 다면 꼭 전문가에게 터놓고 왜 그러는 건지 묻고 싶었다.

무엇인가 하면 크고 작은 나쁜 일이 닥쳤을 때 가장 마지막 낭떠러지 지점까지 나를 몰아붙여 기필코 그것보다 훨씬 크고 나쁜 해프닝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변수들은 죄다, 그것도 엄청 리얼한 4D 즈음되는 상상력으로 머릿속에서 구현한 뒤 그 그림이 너무 아프면 어느새 숨죽여 울고 있기까지 한다.


결혼 전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결혼하고 나서는 그 대상이 주로 딸이나 남편이 되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 잃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물론 내 자신의 장례식 또한 몇번 치뤄봤다)


나쁜 일이 없어도 이따금 정말 갑작스레 그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처럼 이런 내 이면을 누구라도 알게 되면 손가락질할까 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어쩌려고 나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상상'으로 내 머릿속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상상이 현실이라도 될 것처럼.


그런데 나와 비슷한 버릇이 있지만 그 버릇으로 그렇게 크게 고민하지 않는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의 말씀은 심플했다.

"뭔지 알아요.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것 같아요"


의사도 아니고 조물주는 더더욱 아니기에 그녀의 말이 100% 신빙성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를 안도감이랄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그러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다가 지우다를 반복하다 현생에 치어 잊어가고 있을 때 즈음- 무심코 넘긴 뜻밖의 페이지에서 키워드를 발견했다.

과각성(hypervigilance)
인간은 전쟁 지역처럼 무서운 환경에 놓이면 종종 다른 상태로 변한다. (중략) 네이딘은 로버트가 교실에 앉아 수학을 배우려고 노력하다가, 며칠 후면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 사람이 자신에게 또다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로버트의 정신력은 단 하나, 바로 위험을 감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건 로버트의 뇌의 결함이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환경에서의 자연스럽고도 반드시 필요한 반응이었다.
                                                        -도둑맞은 집중력 <스트레스와 만성적인 각성상태> 중-

이미 익히 알려진 개념이다.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의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후 중독, 비만, 우울, ADHD같이 종종 다른 문제들과 관련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 한 때 폭식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말끔히 나았다. 그보다는, 과각성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매우 큰 깨달음을 주었다. 숲 속에서 곰의 공격의 자주 발생하게 되면 우리는 과각성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설사 그 곰이 나타나지 않는 날이라도 항상 다른 위험요소를 찾게 된다는 것.


우리 딸이 아직 두 돌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녹내장을 진단받아와 엄청난 두려움에 떨었던 그때. 한동안 나는 훗날 남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우리 예쁜 딸의 모습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슬픔에 잠겼었다.

남편과 부부싸움이라도 크게 한날이면- 이미 내 머릿속에선 우리가 이혼법정에 서 있었으며 편부모가정에서 살아가며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수많은 편견, 따돌림과 싸워나가야 했던 나의 모습과 딸의 가상의 미래를 겹기도 했었다.

그리고 남편이 한쪽 손만 저린다고 했을 땐(아직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일단 병원에서 고지혈증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와 식이요법 개선을 병행 중이다)- 뇌출혈, 뇌졸중으로 차례차례 쓰러졌던 아빠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언젠가는 그들처럼 일찍 우리를 떠나갈 거라는 생각에 몇 날며칠을 잠도 못 이뤘었다.

그냥 너무 행복할 때도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겨 혼자 남겨지는 것이나 내가 이 두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게 될 것을 상상한다...


그렇게 나는, 내 발밑에 놓인 현실에 집중하기보다는 내 온 정신력을 더 큰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데 쓰며 견디기 힘든 상황에 내 나름의 방식대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전히 내가 감당해 내야 할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새로운 위험에 대비해 마음이 덜 다칠 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 인생에 분명히 일어났던 해프닝으로부터 어린 날의 내가 느꼈을 공포가 늘 다른 생각(생기부에는 좋은 말로 상상력이 풍부하다 적혀 있었다)을 함으로써 혼자 견디기 힘들었을 시간을 견뎌왔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어렸던 난, 무언가에 쫓기듯 살았다. 녹록지 못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린 날의 나는 늘 꿈을 꾸었고 상상했으며 나름 그 꿈을 먹으며 살아내는 노력을 했으니 나의 이 끔찍이도 리얼한 상상력은,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행복한 경험의 축적이 부족해서, 이따금의 행복이 불안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는 늘 들뜨지 않도록 자신을 꽁꽁 묶어놓으며 살았었다.

 


이런 나도 말 그대로 지금은 가정적인 남편 사랑둥이 자식과 함께 그림 같은 집은 아니어도 우리만의 공간에서 평화롭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내 딸은 나의 정서적 결함을 물려받지 않았다.(오은영박사님 말씀처럼 이를 악물고 끊어냈고 나의 정말 '괜찮은 남편'이 아빠라는 변수가 무엇보다 컸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고 딸한테 가르치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박했다.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쯤, 너무 닦달하지 않고 안아주어야겠다. 내가 나를 좀 더 관대하게 포용해 주는 것,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면 언제 어디서 곰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점차 흐릿해져 더욱 풍요로운 현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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