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법대학장회의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전의 일이다. 제4회를 맞이한 아시아 법대학장 포럼을 이번에는 우리 학교에서 주최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학교 친구들 거의 모두가 회의 준비에 참여했고, 나는 공항 영접과 회의 및 만찬 통역을 맡았다. 나는 친구 민아와 한 조가 되어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각자 비행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까지 안내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4월 중순이었지만 아직 날씨가 추워 하루 종일 공항에서 대기하려니 손발이 시릴 정도였다. 그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일본 규슈대학의 히데타케 교수님이 도착하셨다. 히데타케 교수님께서는 버스 출발시간까지 조금 기다리셔야 해서 그동안 지루하시지 않도록 민아와 나는 열심히 말동무를 해 드렸다. 나는 서툰 일본어로 몇 가지 여쭤보기도 했는데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반가워하시며 히로시마 사투리가 섞인 나의 일본어를 잘 알아들으시고 대답도 친절하게 해주셨다. 마지막 손님이셨기 때문에 교수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우리는 환영만찬장으로 향했다. 이미 다른 손님들께서는 모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계셨고 우리가 도착하자 곧 행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고 우리는 각자 그날 행사 진행요원 역할을 하며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용훈 전대법원장님의 기조연설 통역을 맡았기 때문에 조금은 긴장한 채 서둘러 학교로 갔다. 회의장에 도착해서 마이크 테스트까지 마친 후 곧 회의 참석자분들이 입장하기 시작했고 나는 대법원장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가 내 소개를 드리고 옆자리에 앉아서 미리 받은 원고에 혹시 수정하실 부분은 없는지를 여쭤보는 등 간략히 대법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의 전체 사회를 맡으신 큐레시 교수님의 인사로 회의가 시작되었고 기조연설 순서가 돌아왔다. 대법원장님이 연단에서 시고 나는 노트를 들고 옆에 섰다. 다행히 대법워장님께서는 미리 말씀드린 대로 두세 문단에 한번 정도로 잘 끊어서 원고를 읽으셨고, 미리 주신 원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통역을 하는 것도 무척 수월했다. 무사히 첫 통역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회의장 안팎에서 고생하는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는 잠깐씩 수다도 떨면서 즐겁게 행사 진행을 도왔다.
이용훈 전대법원장님은 그때를 시작으로 통역이나 번역일로 다시 뵐 기회가 더 있었는데, 우리 학교 산하 법학연구원의 제1회 심포지엄 때도 대법원장님의 speech를 통역하게 되었다. 이때에는 미리 원고를 주지 않으셨는데, 대법원장님이 오셨을 때 대략 어떤 내용을 말씀하실 건지 여쭤보았을 때에도 간단하게 끝낼 거니 걱정 말라는 말씀뿐이셨다. 그럴 리가 없으리란 것은 경험상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다른 교수님 두 분은 미리 원고를 주셨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통역을 했는데, 걱정 말라시던 대법원장님께서는 연단으로 나가서 간단하게 인사를 하신 뒤, 갑자기 부의 창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단어들을 잔뜩 섞어가며 역사적인 이야기를 한참이나 하셨다. 나는 열심히 대법원장님의 말씀을 노트 테이킹 하며 순차통역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법원장님께서 웃으시며
“내가 미리 원고를 안 줘서 어려울 텐데 통역을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 순간 회의장에 있던 한국인 참석자분들은 크게 웃으시며 내게 박수를 쳐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외국인 참석자분들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그 말을 어떻게 통역해야 할지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연사의 말을 1인칭으로 내가 연사인 것처럼 통역을 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 순간에는 대법원장님께서 내가 하는 통역이 만족스러우신 것 같다고 간략하게 영어로 설명을 하고 넘어갔다. 간단히 인사만 하실 거라고 생각했다가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내용들이 나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역시 뿌듯한 통역 경험 중의 하나이다.
아시아법대학장포럼 통역을 한 날 저녁에는 대법관님 주최 환영만찬이 있었다. 교수님과 이번 행사 총괄을 맡은 난이와 함께 나는 미리 고즈넉한 한식 레스토랑인 만찬장으로 향했다. 만찬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저녁을 미리 간단하게 먹고 통역 준비를 했다. 시간이 되어 교수님들께서 도착하셨고, 나는 대법관님이 앉으시는 헤드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제일 먼저 환영사가 있었고, 대법관님께서도 원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환영사 통역을 마쳤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공항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기회가 있었던 규슈대학의 히데타케 교수님께서 답사를 하실 차례였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제가 영어가 서툴러서 일본어로 답사를 할 테니 다혜상이 영어로 통역을 해주길 바랍니다.”
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크게 당황했다. 통역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었을뿐더러, 일본어는 내 통역 언어 조합(language combination, 나는 모국어인 A 언어가 한국어, B 언어가 영어이다)에도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통역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2개 언어를 combination으로 가진 통역사이지만 3개 언어 통역사의 언어 조합은 A-B-C, 즉 예를 들면, 모국어인 한국어가 A 언어, 영어가 B 언어, 그리고 제3언어인 일본어가 C 언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C언어의 경우, C언어에서 B언어로 즉, 일본어를 듣고 영어로 통역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반대방향의 통역은 하지 않는다. 나의 combination에는 있지도 않은 일본어를 듣고 한국어도 아닌 영어로 바로 통역을 해야 하니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 만찬장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향해 있었고 나는 속으로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썼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히데타케 교수님은 바로 답사를 시작하셨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 테이킹을 하며 영어로 통역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아주 알맞은 길이로 끊어서 말씀을 해주셨지만, 일본어가 서툰 나는 내생에 최고의 challenge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단어 하나라도 놓칠까 봐,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단어는 평소보다 몇 배로 집중해서 재빨리 앞뒤 맥락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느라 얼마나 기를 쓰고 통역을 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저 큰 문제없이 끝난 것이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마지막 인사 “Thankyou.”를 뱉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자리에 앉고 말았다. 난이가 살짝 가져다준 물을 마시며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뒤로 식사시간 내내 헤드테이블에서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갔다.
각 나라별로 서로 다른 사법시험제도에 대해서 물어보는 등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통역했다. 대법관님을 비롯한 다른 교수님들께서는 통역사인 내게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도 하셨다. 그중에는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를 모두 잘하시는 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내가 일본어를 영어로 통역한 것을 들으시고는 어려웠을 텐데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럴 리가 없는데 참 관대하신 교수님이셨다. 어찌 되었든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계속해서 교수님들의 대화를 통역했고, 긴장이 풀렸을 때쯤 몽고에서 오신 한 교수님께서 대법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대법관님께서는 흔쾌히 좋다고 하셨는데 문제는 그 교수님께서 영어를 전혀 못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께 온 조교가 교수님의 몽골어를 영어로 통역하면 내가 그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대법관님의 한국어를 내가 영어로 통역하면 그 조교가 내 영어를 다시 몽골어로 통역을 하는 식이었다. 앞서 했던 일본어-영어 통역 다음으로 나의 통역사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해보는 생릴레이 순차통역이었다. 만찬 참석자분들은 다들 식사를 멈추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고 계셨다. 다행히도 그 조교가 영어를 꽤 잘해서 몽골어->영어->한국어, 한국어->영어->몽골어로 이어지는 릴레이 통역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무사히 그 몽골 교수님과 대법관님 간의 대화가 끝이 났고, 나는 다시 한번 큰 박수를 받았다. 원래 통역사는 그 존재가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그림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회의 참석자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 통역사의 윤리인데 나는 그날 그 윤리를 어긴 셈이었다. 만찬이 무사히 끝나고 참석자분들이 만찬장을 나가실 때 나는 교수님 옆에 서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배웅을 해드렸다. 많은 분들께서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수고 많았다”, “통역 최고였다!” 등 저마다 한 마디씩 칭찬을 해주셨고, 대법관님께서도 내게 오셔서 악수까지 해주시며 “수고 많았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모든 분들이 버스에 타고난 후 마지막으로 나를 비롯한 진행요원들이 탔는데 버스에 미리 앉아계시던 회의 참석자 분들이 내가 버스에 올라타자 큰소리로 환호를 해주시며 나를 맞아주시는 바람에 나는 얼떨떨했지만 그날의 나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 같아 무척 뿌듯했다.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많았지만 그만큼 끝나고 나서 보람도 아주 큰 통역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을 보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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