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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May 03. 2023

관계의 미니멀리즘과 문단속

나는 물건에 관해서는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 없다. 좋아하는 것은 마구 쌓아 놓고 사는 습성 때문이다.  중간중간 재고 체크를 하면서까지 개수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옷과 신발도 마찬가지다. 정기적으로 같은 라인의 것을 산다. 간혹 잘 쓰고 있던 물건의 회사가 망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 패닉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쇼핑 자체가 상당히 단순화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개수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만큼은 당당히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조직생활을 할 때는 좋든 싫든 관계를 맺어야 했고, 일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나는 그것이 월급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은퇴를 한 후에는 원하지 않는 관계는 맺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지금은 내가 선택한 관계 만을 유지하고 있다. 


나도 어린 시절 <외롭지 않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다. 도돌이표 같은 하소연을 들어주고, 관심도 없는 네 사촌 땅산 얘기도 들어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같이 욕하고, 입증이 불가능한 지자랑에 부러움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관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세금이었고, 그것이 세금이라면, 이런 날강도 탐관오리들 같으니라고. 나는 소작농에 불과했을 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다가 "제발 그만 좀 해"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 딴 얘기 하려면 네가 밥이라도 사던가. 아니면, 제발 셧터뻑업 하고 그냥 날씨 얘기나 하란 말이야. 나는 그때의 흑화 된 내가 과하게 예민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두 세번 똑같은 하소연을 하면 만나지 않았다. 불평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은 같은 진흙탕에서 구르며 매일 똑같은 얘기를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이 본인은 물론 남의 시간과 멘탈까지도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워 버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나에게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마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똑같은 고민들을 말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정말 단 한순간도 그 시간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거절을 하지 못해 타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사연을 자주 접한다. 온갖 무례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섭고 불안한 사람들. 


그래도 괜찮다는 책들이 차고 넘치지만 여전히 "아니야!, 싫어!"라고 외치라는 책들이 계속 나온다. 같은 얘기들의 변주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보고 싶어 한다. 그만큼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나'를 지켜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시래기처럼 바싹 말라 버린 내 빈약한 인간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날은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지 걱정되었다. 동생이 말하길 "오은영 선생 가라사대, 평생 가져갈 관계는 2-3명으로 족하다고 하던데, 뭐가 문제야?" 나는 자식 키우기나 결혼 생활에 대한 상담을 하는 예능프로를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선생이 얼마나 대단 한지는 알 수 없으나, 한 시름 놨다. 


내가 '정상'이라거나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나 또한 보통 정도의 불안에 빠져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마저도 다행이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외로워졌다. 이 무균실에 갇힌 듯한 내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평화로운 일상은 나를 오히려 조급하게 한다. 그러다 불쑥 버스 정류장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얼마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냐는 질문을 듣거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에게 밑도 끝도 없이 무언가 해달라는 요청을 받거나 말도 안되는 평가를 받으며 생각한다. 


선 넘지 말라 그랬지? 


나는 2023년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기 때문에 일단 30분 정도는 쌉 소리를 해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나는 그때도 질문을 듣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처럼. 나 자신에게 닥칠 대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관계의 문을 잘 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이 되었지만, 곧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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