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생명체는 늙을수록 아름다움을 잃어갑니다. 보통은 나이가 들면 주름이 지고, 피부색도 흐릿해집니다. 하지만 온대지역의 낙엽 활엽수는 가을이 되면 여름 내내 짙었던 초록을 지우고, 노랗고 빨갛게 색칠을 합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눈이 황홀해지도록 아름다운 ‘단풍(autumn coloration)’을 보고 즐길 수 있습니다.
나뭇잎의 색깔이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어떤 나무는 녹색을 띤 엽록소가 분해될 때 다른 색상을 띄는 색소가 새로 만들어지고, 또 어떤 나무는 엽록소 아래 숨어있던 다른 색소의 색상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가 왜 가을이 되면 색깔을 바꾸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가지 가설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나뭇잎은 식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만드는 ‘광합성 공장’입니다. 이 공장에는 햇빛을 흡수하는 색소(pigment)가 있습니다. 햇빛은 무지개의 모든 색상을 포함한 백색 광선이지만 나뭇잎에선 특정 파장의 빛만 흡수됩니다. 잎에 있는 엽록소라는 색소가 청색과 보라색, 빨간색 빛은 잘 흡수하지만 초록색은 반사시키기 때문에 잎은 우리 눈에 초록색으로 보입니다.
1957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 식물학과 로버트 에머슨 교수는 원생생물인 클로렐라에 여러 파장의 빛을 쪼여 빛의 파장에 따라 광합성의 결과로 배출되는 산소량을 측정했습니다. 이 결과, 식물은 파장이 680nm의 적색광과 700nm의 근적색광을 함께 받았을 때 광합성이 가장 활발했습니다. 바로 ‘엽록소 a’가 청-보라색과 빨간색 빛을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엽록소 b’는 주로 청색과 주황색 빛을 흡수하고 연두색 빛은 반사합니다.
이처럼 나무는 봄과 여름 동안 광합성을 하면서 포도당을 내부에 축적합니다. 하지만 잎이 떨어지면 잎에 저장된 영양분을 고스란히 잃을 수 있고, 이는 영양분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나무는 낙엽이 지기 전 질소(N), 인(P), 칼륨(K) 등의 영양분을 잎에서 줄기로 옮겨 놓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뭇잎은 광합성을 할 때 필요했던 엽록소 대신 광합성을 돕는 보조색소를 이용합니다. 보조색소에는 노란색을 띠는 카로티노이드와 크산토필, 붉은색을 띠는 안토시아닌 등이 있습니다. 흔히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하는 화초를 어두운 집안에 두면 노란색으로 변하곤 합니다. 초록색을 띠는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본래 가려져 있던 노란색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은행나무와 백양나무, 너도밤나무 등은 녹색에 가려졌던 노란색이 단풍색으로 보이는 경우입니다.
이와 달리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아닌 색소는 가을이 될 때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단풍나무, 신나무, 붉나무, 떡갈나무 등의 나뭇잎을 붉게 물들입니다. 모든 식물에는 카로티노이드처럼 노란색을 띠는 색소가 들어있지만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아닌은 세포 내 당의 함량이 높아질수록 많이 합성됩니다. 그래서 나뭇잎에서 줄기로 양분이 회수되면서 나뭇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월동준비를 할 때 굳이 나뭇잎의 색깔까지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비용-편익 가설’입니다. 일본 훗카이도 대학 산림자원학과의 타카요시 고이케 교수에 따르면 줄기의 바깥쪽에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잎을 만듭니다. 당년에 자랄 모든 줄기의 원기가 전년도에 형성된 동아(winter bud 생장하지 않고 쉬고 있는 눈) 속에 미리 만들어져 있다가 봄철에만 싹이 트는 ‘고정 생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줄기의 안쪽에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잎을 새로 만듭니다. 동아 속에 미리 만들어져 있던 원기가 봄에 자라서 춘엽(春葉)이 되고, 곧이어 새로 만들어진 원기가 여름 내내 하엽(夏葉)을 만들어 두 종류의 나뭇잎을 가지는 ‘자유 생장’을 하는 것입니다.
자유 생장을 하는 나무는 여름철 새로 만든 잎의 광합성 효율이 봄에 돋아난 잎보다 높았습니다. 잎을 만드는 비용과 광합성 효율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오래된 춘엽을 먼저 떨구고 새로 돋아난 하엽을 낙엽이 지기 전까지 활용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단풍도 줄기의 안쪽부터 시작돼 바깥으로 번져갑니다. 여기에는 자작나무, 포플러, 버드나무, 가래나무, 느릅나무 등이 속합니다.
고정 생장을 하는 나무는 봄철 한때에만 잎이 돋아나기 때문에 자유 생장을 하는 나무에 비해 광합성 효율이 낮습니다. 그러나 주변 나무들과의 경쟁에서 견디는 능력은 뛰어납니다. 단풍나무, 층층나무, 까치박달, 신갈나무 등이 그러한데 이들 나무들은 줄기의 바깥쪽에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낙엽이 질 때까지 단풍이 들지 않는 나무도 있습니다. 오리나무는 9월 말에서 10월 중순에 단풍이 드는 보통의 나무들과 달리 11월 초까지 녹색을 유지하다가 어두운 녹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해갑니다. 이 나무는 낙엽이 지기 직전 잎에서 줄기로 양분을 재흡수하는 양도 매우 적습니다. 아마도 뿌리에 혹처럼 생긴 박테리아가 기생하고 있는데, 이들이 대기 중의 질소를 먹기 좋은 형태로 공급해 주기 때문에 양분을 재흡수할 필요성이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광보호 및 타감 물질’ 가설입니다. 날씨가 추워질 때 엽록소가 파괴되면 늦여름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자외선을 차단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붉은 단풍은 구름이 끼기보다는 청명한 날씨, 그리고 비가 내리는 습한 환경보다 건조하고 시원한 날씨가 지속될 때 더 밝고 아름답게 색상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9월 중순부터는 엽록소가 파괴되지만, 안토시아닌 색소가 분비되면 나뭇잎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안토시아닌, 카르테노이드, 크산토필 등은 엽록소가 햇빛에 의해 광산화되는 것을 막는 보조색소입니다. 또한 식물의 생장, 발생, 생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지만, 부수적인 기능을 하는 2차 대사 산물입니다. 2차 대사 산물은 색소 기능 이외에 외부에서 병원체가 침입했을 때 방어하는 항생제 역할을 합니다. 일례로 단풍나무 주변에는 다른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는데 잎에 들어있는 안토시아닌과 같은 타감 물질(allelochemicals)들이 주변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타감 작용(allelopathy)을 함으로써 햇빛과 물, 양분을 둘러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진화 가설’입니다. 나무에게 있어 수액을 빨아먹는 진딧물은 흡혈귀와 같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어미 진딧물이 잎에 알을 낳기 직전에 건강해 보이는 초록색 대신 붉고 노랗게 변색함으로써 다른 나무로 시선을 돌렸을 것이란 주장입니다. 하지만 진딧물이 나뭇잎의 색상을 구별하는지, 실제로 단풍이 일찍 든 나무와 늦게 든 나무가 나란히 있을 때 진딧물이 어느 나무에 알을 많이 낳는지 등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매년 가을마다 방방곡곡의 산과 숲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물들이는 단풍. 하지만 단풍이 드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문헌
Stephen Pallardy, 2008, Physiology of Woody Plants(3rd), Academic Press, pp.211-215.
T. Koike, 1990, Autumn coloring, photosynthetic performance and leaf development of deciduous broad-leaved trees in relation to forest succession, Tree Physiology, 7(4), 21-32.
이경준, 1997, 수목생리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pp40-41, 163-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