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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호 Nov 04. 2018

남촌의 기구한 역사

서울 중구 충무로 & 필동

필동(충무로)_Pil-dong(Chungmu-ro) ⓒ아는동네


평소 사람이 오가는 통행로로 활용되었던 마른 개천, 하지만 비만 오면 금세 물이 불어났고 불어난 물이 청계천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에는 건천동(乾川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 인근 명보아트홀 주변에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성웅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지만, 사실 정확한 위치는 삼풍상가 인근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말라붙은 개울, 혹은 물이 흐르는 개울을 가리지 않고 죽마고우라 불리던 서애 류성룡과 이순신은 이 냇가에서 열심히 뛰놀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른 개울 바닥으로 스며든 기운이 범상치 않았는지, 아니면 궁과 가까운 남촌의 입지적 조건이었기 때문인지 정인지, 김종서, 이항복 등 내로라하는 사대부와 유생들이 이곳에서 성장하거나 거주했다. 궁궐을 끼고 있는 북촌이 조선 사대부의 심장과 같은 마을이었다고는 하지만, 청계천과 남산을 이웃하고 자리 잡은 남촌은 ‘딸깍발이’로 대표되는 청빈하면서도 검소한 유림의 기개를 간직한 마을이었다.



충무로의 역사는 곧 근현대 서울의 역사다


본래 경복궁 앞 광화문 앞 육조 광장에서 동서로 뻗은 종로를 축으로 하여 사직단-서대문, 종묘-동대문으로 이어지는 도심을 구성했던 조선 왕조와는 달리 일제는 서울, 아니 경성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광화문이 있던 자리에는 식민통치의 상징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남대문 주변 도성을 헐어 서울역을 지나 용산 일본군 주둔지로 이어지는 남북으로 뻗은 대로를 건설했다. 조선의 중심가였던 북촌과 종로 일대는 조선인의 중심가로 남겨둔 채, 일제는 남촌 일대를 혼마찌(本町)라는 이름의 일본인촌으로 변모시켰다.


수많은 상점과 요정, 호화로운 살롱들이 만들어졌고 남산 신궁이 굽어보는 이곳에서 일본인들은 제국의 영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화동, 창신동을 품어 안은 낙산의 허리를 베어 조각낸 돌이 근대식 건물을 만드는 데 투입되었고, 청계천은 북쪽의 조선인 거주지역과 남쪽의 일본인 거주지역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지형적 경계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경성의 대개조는 그 자체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일제의 관점을 여실히 증명했고, 혼마찌로 변형된 남촌은 아이러니한 현실의 구슬픈 상징과도 같았다.



남촌, 건천동에서 혼마찌로,

그리고 충무로


하지만 눈물로 얼룩진 시간이 지나 거짓말처럼 광복이 찾아왔고, 한양에서 경성으로 파괴적인 변화를 강요당했던 도시는 일제 통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차용한 을지로, 유학자 이황의 호에서 착안한 퇴계로처럼, 혼마찌란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랑스러운 영웅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지금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충무로’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2017년 현재의 평온한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고, 숨 가쁘게 변화해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충무로 인근에는 영화관이 많았기 때문에 한때 서울을 대표하는 영화산업의 메카로 불리기도 했다지만, 현재 대부분의 영화 관련 업체들은 강남 권역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다. 대기업, 대자본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멀티플렉스의 파도는 오랜 전통이 살아 숨 쉬던 극장 대부분을 세월의 뒤안길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영화 포스터를 직접 그려 거대한 입간판을 내걸었던 시대, 그리고 어떤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 정보를 공유하던 시대를 잊어간다.



하지만 습하고 어두운 충무로 골목에서도 인쇄소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시간과 요일을 가릴 것 없이 골목에는 기계음이 울려 퍼지고, 미닫이문 너머로 기계 앞에 선 사장님은 약간의 신중함과 짓궂은 퉁명스러움을 버무려 손님을 맞이한다. 어떤 인쇄물이나 책을 가져가더라도 곁눈질 한 번에 종이의 종류를 줄줄 읊는 모습에서는 수십 년 전통, 2대째 이어오는 가업의 힘이 느껴진다.



딸깍발이 선비들, 식민주의의 달콤한 환영에 젖어들었던 일본인, 영사기로 쏟아내는 빛의 현란함에 매혹되었던 그 시절 조조할인, 그리고 오늘날 소수의 젊은이와 바쁘게 움직이는 인쇄기의 거리 충무로. 그저 한산하고 조용해 보이는 이 거리에는 사연이 가득하다. 2017년의 눈으로 이 거리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지만, 그 시선은 시간을 거슬러 백 년을 되짚는다. 충무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서울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2017년 1월, 아는동네 포스트를 통해 배포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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