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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 Oct 16. 2021

“뭐 해?”에 대한 고찰

나의 귀여운 클래스메이트들

신오쿠보의 한국어 학원에서 수업을 하다가, 일본인 남학생 (대학교 4학년생)으로부터 맘에 드는 한국 여자애가 있어서 한국말로 메시지를 보내려면 어떤 말로 시작하는 게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바로 “뭐 해?”를 추천. 때에 따라 같이 쓸 수 있는 "자니?"까지 2종 세트가 있다는 말과 함께. 아 물론, 만약 헤어진 이후에 보낸다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단 말도.


너무 낡았나? 나는 “뭐 해?”라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렇게 콩닥거릴 수가 없던데. 물론 서로 호감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와세다에서 내가 수강을 한 <대우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화법 수업에서 드라마를 만들어 발표를 해야 했다. 4~5명씩 팀을 짜서 만들어야 했는데 친구나 연인 등 아주 가까운 사이에 사용하는 화법, 직장 내에서 사용하는 화법, 서비스 업종 등에서 고객을 상대로 사용하는 화법 등이 골고루 들어가도록 대본을 짜는 것이 관건이었다.


우리 팀은 일단 첫 장면이 연인 간의 전화통화라는 상황만 설정하고 보통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의견을 교환했는데 국적이 달라서 그런가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질 않았다. 한국인 나 하나, 중국인 둘, 미국인 하나. 전체 5~6분 가운데 잠깐 보여줄 연인 간의 대화가 임팩트가 있어야 할 텐데 모두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고 난감해했다. 그렇게 머리를 짜내다가, 그냥 내가 한국 스타일로 말해볼 테니 받아 적으라고 하고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해?” (남) (말투는 "모 행?"에 가깝게)

“막 밥 먹은 참이야.” (여)

“뭐 먹었어?”

“파스타랑 샐러드.”

“맛있게 먹었어?” ("맛있게 먹었쪄?"에 가깝게)

“응, 맛있었어.”

"맛있는 거 먹는데 내 생각 안 났어? 넌 먹을 때가 예쁜데. 그걸 못 봤네!"

"먹을 때만 예뻐?" ("예뽀?"에 가깝게)

괄호 안은 전부 나의 디렉션. 물론 우리가 구사해야 할 것은 일본어이므로 어떤 느낌인지만 전달했다.

이 대사를 들은 멤버들이 경악. 중국인 여자애들은 닭살 돋는다고 난리. 남자 주인공인 R은  아무리 그래도 이 말을 도대체 어떻게 입 밖에 내느냐고 난리. 이상하다. 어차피 일본어니까 느낌이 중화되어 딱히 오그라드는 건 없지 싶었는데.


결국 여자친구 역을 하기로 했던 중국인 여자애가 자기는 살면서 그런 말을 해본 적도 없고 도저히 대사를 못 치겠다고 해서 내가 대신 그 역을 맡는 상황에 이르렀다. 남자 주인공 R 역시 못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교환학생인지라 학점을 잃을 수는 없어서 그랬는지 뜻밖에도 연습에 몰두.


어쨌든 연인 간의 전화통화 장면(데이트 약속 잡는 것까지가 전화통화 장면이고 이후 둘이 간 데이트 장소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장면이 있다)을 그렇게 만들어서 발표를 했는데 다른 여자 클래스메이트들 (알고 보니 한류 팬들) 반응이 너무 웃겼다. "뭐 해?"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꺄악, 꺄악.”

이때부터 우리의 R 갑자기 연기혼을 불태우기 시작.


나중에 보고 나서 다들 하는 말이

“한국 드라마 보는 것 같았어!”


어머니가 일본인이셔서 그런지 어딘가 다니엘 헤니 같기도 하고 머리색이 까만 톰 크루즈 같기도 한 남자 주인공 R 덕분에 애들이 심하게 몰입한 거다 싶지만. 결국 우리가 그날 발표의 인기 팀으로 뽑혔다.


"뭐 해?"는 알게 모르게 세계로 뻗어 가고 있었다.


와세다 대학 연극박물관. 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한 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학 시절 단골이었단 말을 듣고 1년 동안 나도 그러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학업과 노동에 찌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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