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에서 만난 의느님
2015년부터 아이폰6를 쓰다가 작년에야 비로소 12로 바꾸었다. 일본에 머물렀을 때도 한국에서 쓰던 6를 갖고 가 유심만 교체해 사용했는데,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아이폰이 물을 먹는 사건이 발생했다. 충전부와 스피커 쪽으로 들어간 물이 액정을 점점 타고 올라가는 게 보이더니 2,3분도 안 있어 "안녕, 사요나라" 하고 전원이 꺼져 버렸다.
동시에 내 심장의 전원도 잠시. 아이폰 6를 사서 써온 4년 간의 삶의 기록이 죄다 담겨 있었기에. 그치만 "백업이 뭐예요? 먹는 거예요?" 하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사건은 오전에 있었고, 나는 부랴부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케부쿠로의 사설 수리점을 찾아갔다.
그 수리점은 중년 남자 혼자 하고 있었는데, 나의 자초지종을 듣더니, 일단 침수된 내부를 세척해서 말린 뒤 이것저것 만져봐야 한다고 했다. 수리가 안 되면 세척비용 이천 엔만 받을 거고, 수리가 되면 그 뒤 무얼 하느냐에 따라 비용이 추가돼 삼만 엔이 넘을 수도 있다 했다. 삼만 엔이라는 금액을 듣고 처음에는 기겁했으나, 문제는 사진과 동영상 등의 자료였기에, 무조건 해달라고 부탁한 뒤, 1시간쯤 있다가 다시 찾아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수리기사가, 씻고 말려 놨으니 같이 전원을 켜보자 하며 내 눈앞에서 전원을 켰다. 그런데. "아이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온도를 낮춰야 합니다"라는 뜬금없는 온도 경고 메시지가 뜨더니 거기서 더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물론 전혀 뜨겁지 않았고.
수리기사는 내 아이폰이 마치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듯 후다닥 내려놓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여기서는 더 이상 해 드릴 게 없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네? 사진이나 동영상 못 건져요?"
"네.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다른 데 가도요?"
"아마 다른 데 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심장부인 컴퓨터(메인보드를 말하는 듯)에서 생긴 문제라."
"그러니까, 죽어버렸다는 건가요?"
"네, 음, 혹시 한참 있다가 컴퓨터가 스스로 온도가 내려갔다고 판단을 하면 다시 작동을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뭐라는 거야, 그래서 죽었다는 거야 살았다는 거야?
사건은 오전에 발생했고, 그때가 3시쯤. 그제야 한 끼도 먹지 않은 걸 깨닫고 집에 돌아와 대충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은 뒤 노트북으로 검색 시작. 집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수리점 하나가 괜찮아 보여 다시 들고 갔다.
거기에서는, 일단 들여다 보고 수리가 안 될 것 같으면 천 엔만 받겠다고 했다. 1시간 있다 오라 하여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 긴장된 맘을 안고 다시 찾아갔다. 직원은 내 앞에 전화기를 살포시 내려놓으며 "못 고치겠네요"한다. 아니 근데 이 사람들 아까는 못 고치면 천 엔 받겠다 했는데 천 엔 달란 말도 안 하고 들어가 버리네. 이게 무슨 얘기냐, 아예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지. 애초에 온도 경고 메시지를 보고 그냥 손도 안 댄 듯하다.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 가슴에도 비가 쏟아졌다. 다음 날이 가을학기 개강이라 일단 집으로 돌아와 대충 마무리하고 잠을 청하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 인간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개똥 같은 생각을 하다 날이 새고.
폰은 못 쓰게 되더라도 데이터는 건지자 싶어 아침부터 아예 데이터 복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수리점을 검색. 다행히 신주쿠역 근처에 한 군데가 있어 학교에서도 멀지 않길래 공강 시간을 이용해 찾아갔다. 가게는 신주쿠 고층빌딩 사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고 허름한 빌딩 3층에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경점이나 휴대전화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유리 진열장 같은 게 한가운데 있어서 수리가 이루어지는 안쪽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벽 쪽으로는 손님이 앉아서 대기할 수 있게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실내에는 엄청난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헤비메탈, 아니 데스메탈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좡ㅇ댜후자투사좌이라라베릌 튱켱좡!@#$#^ㅑ*(*(**^&%끼야야우"
'아, 이건 아닌 것 같다. 나갈까?' 하는데,
안에서 빨간색 번개머리를 한 청년이 나온다. 바로 그렇다, 피구왕 통키. 음악을 따라 번개머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밤에는 밴드를 할 것 같다. 왠지 기타는 아니고 드럼을 칠 것 같다. 곧이어 여자친구인 것 같은 직원이 나온다. 머리는 노랗고 눈썹은 일부러 민 듯 하나도 없다. 코에는 피어싱. 입을 열면 혀에도 피어싱이 있을지 모르겠다. 뭐 그런 따위의 생각을 하는 참에 남자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제 아이폰이 침수(일본에서는 '수몰'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게 더 무섭다. 수몰이 뭐야 수몰이)가 돼서 한 번 수리점에 맡겼는데 그 뒤로 이런 게 떠요, 하면서 화면을 보여주니 갑자기 엄청 순박한 얼굴로 한글을 보고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한다. 순간 우리 한국어 학원 학생들 생각이 나면서 한 30초 동안 선생님 모드.
'아니 근데, 이케부쿠로 아저씨는 한글 몰라도 온도계 그림만 보고 척 알던데, 이 친구는 왜 모르는 거지? 초짜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번개머리 청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말.
"아, 배터리 문제네요."
"네에? 소오데스까?"
"그런데 배터리 교환해도 터치가 안 되면 소용없으니까 어쩌면 액정 교체해야 할 수도 있어요."
"네! 얼마든지요!" 살 길이 열린다면야.
고막이 찢어질 듯한 헤비메탈 속에서 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 내 상반신은 거의 유리 진열장을 타고 넘어가 있었다. 번개머리 청년은 그런 나를 보고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배터리 교환부터 해보자며 잠시 앉아 기다리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 이런 것인가. 도대체 뭐라는 건지 모를 헤비메탈을 들으며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20분 정도가 지나고 그가 나와서 아이폰을 보여준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어때? 내가 좀 하지?" 하는 듯하다.
나는 울 뻔했다.
"그런데 역시 터치가 안 되네요. 액정교... ."
"네네네네네네! 그럼요!"
아이폰을 맡긴 뒤 학교로 돌아갔다가 두 시간 뒤에 다시 들렀다. 그가 나온다. 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순간 그 수리점의 이름이 떠올랐다. 무려 '스마호스피탈(Smart+Hospital)'. 아, 당신이 진정 의느님이시군요!
"다른 데 갔는데 다 안 된다고 했어요. 정말 너무 기뻐요! 정말 감사합니다."
"훗, 소오데스까?" 번개머리의 한쪽 입꼬리가 마저 올라갔다.
"어쨌든 한 번 침수(수몰)되면 오래 못 쓰니까 빨리 백업하고 다른 스마트폰을 마련하시는 게 좋아요."
세상에 이렇게 상냥하기까지 하다니.
결과적으로 비용이 총 11,500엔 정도 들었지만, 하나도 유실된 게 없으니 아깝지 않았다. 아름다운 헤비메탈 선율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달라진 듯했다.
그럼 이쯤에서 도대체 어쩌다가 침수되는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면. 사실 엄청 창피한 건데 누구라도 한 명 나 때문에 웃을 수 있다면 하는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
일본 화장실에는 저런 게(두 번째 사진) 있다. 변기 뒤에 세면대가 달려 있는 건데 물을 내리면 저기서도 물이 나온다. 손 씻으라고. 전에 살던 셰어하우스에는 저런 게 없었는데 이사를 한 곳에는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때인 데다, 변기 뚜껑도 늘 세워져 있어 눈에도 잘 띄지 않고, 그러다 보니 존재감도 잊고 있던 어느 날.
저는 아이폰을 손에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앉았다가 내려놓을 곳이 마땅치 않자 예전 습관대로 팔을 뒤로 뻗어... . 네, 그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