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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 Oct 24. 2021

필담의 추억

긴시초 플리마켓에서 만난 어느 판매자

*

여행으로 도쿄를 다닐 때부터 빼놓지 않고 꼭 들르던 곳이 있다. 바로 플리마켓. 도쿄에는 정말 많은 플리마켓이 있는데, 시민 자치 조직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니면 일종의 시민단체라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그런 모임별로 주최를 달리 하여 주말마다 곳곳에서 열린다. 예를 들어 도쿄의 서쪽 기치조지(吉祥寺)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은 '도쿄 리사이클 운동 시민의 모임'이 주최이고,  스카이트리가 가까운 도쿄의 동쪽 긴시초(錦糸町)의 경우 한쪽은 '리사이클 운동 시민의 모임'(기치조지와 다름), 또 한쪽은 '환경을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이 주최가 되어 무려 두 군데에서 열린다. 날짜가 겹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어쩌다가 겹치는 날이면 어느 동네 플리마켓을 가볼까 하는 고민의 여지없이 긴시초로 향하곤 했다.


일본  지역에서 열리는 플리마켓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지만 도쿄의 플리마켓이 좋았던 까닭은, '업자'들의 참가를 제한하는 곳이 많아 사람들이 정말 자기가 쓰던 것을 가지고 나와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특색도 조금씩 다른데, 개성 강한 패션 피플이 모여 사는 고엔지나 시모키타자와(下北) 가까운 기치조지는 그에 걸맞게 독특하고 멋진 구제 옷이나 아이템을 들고 나오는 이들이 많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긴시초는 노인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세대의 개인 참가자는 물론, 가족 단위의 참가자가 많아 도쿄 시민들의 삶의 단면을 그들이 내놓은 물건을 통해 '열람'  있다. 이곳은 특히 규모가 크다 보니 캐릭터 용품이나 애니메이션 관련 굿즈 등을 대량으로 갖고 나온, 업자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판매 가격이 워낙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한 편인 데다 기분파들이 많아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깎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는 주말의 활력소가 되었을 플리마켓이 안타깝게도 팬데믹 상황의 도래 이후 계속 중지되었다가 최근 '긴급 사태 선언'이 해제되면서 (2021년 10월 넷째 주 기준으로) 조금씩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양이다.


**

두 달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짐 정리를 하다가 서랍 깊이 넣어 두었던 옷 하나를 발견했는데, 긴시초 플리마켓에서 구입한 짧은 민소매 원피스로, 전체가 스팽글이 달려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옷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혼자 어슬렁어슬렁 하면서 사람들이 내놓은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판매자가 몇 벌의 옷을 앞에 두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가까이 가서 옷이나 물건에 손을 대면 판매자가 설명을 해준다든가 옷을 펼쳐보라든가 하기 마련인데 그 판매자는 가벼운 목례만 하고 별 말은 없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어쩐지 좋았던 것 같다. 부담스럽지 않아서.


블라우스도 만져 보고 슬랙스도 만져 보다 맨 아래를 보니 웬 스팽글 뭉치가 접혀 있었다. 꺼내어 드니 짧은 원피스. 나이 들고 스팽글은 '끊'은지 꽤 오래되었건만, 나도 모르게 값을 물었다.

"얼마예요?"


내가 묻자, 그녀는 나무 둥치 옆에 있던 작은 화이트보드를 집어 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400엔이에요."


잠시 당황. 청각 장애인이라서 내 입술 모양을 읽고 답을 쓰는 것인지, 아니면 들을 수는 있는데 말만 할 수 없는 것인지 만약 전자라면 내가 입 모양을 크게 하는 게 좋을 텐데 너무 티 나게 굴면 그건 그거대로 실례일 것 같고, 게다가 내가 외국인이라 발음이 부정확하면 입술 모양도 다르게 읽히는 거 아닌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나는 일단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400엔이면 되게 싸기는 하지만 과연 이걸 입고 다닐 수나 있겠는가 싶어 잠시 내적 갈등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화이트보드에 또 무언가를 적었다.


"미국에서 사 온 거예요. 새 옷이나 다름 없어요."

"아, 그래요?"

"밤에 클럽에 가실 때 이거 입고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쓰더니 그녀가 갑자기 화이트보드를 내려놓고 양팔을 들어 춤추는 몸짓을 해 보였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스팽글 원피스를 싸 달라고 했다. 밤에 클럽은커녕 입고 어디 나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뭐 그냥 무미건조한 삶에 반짝이는 물고기 비늘 하나쯤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볼 때마다 그녀의 춤이 생각날 테니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집에 갖고 와서 입어 보니 들숨 날숨에 스팽글이 요동을 쳐, 혼자 보기도 민망했지만 그녀가 했던 몸짓을 따라 하며 혼자 낄낄댔던 기억이.


이삿짐을 정리하며 한동안 잊고 있던 이 원피스를 어찌 한담 하고 잠시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그날의 기억이 스팽글처럼 반짝반짝거려서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그 기억을 선사해준 그녀는 안녕한지. 안녕했으면 좋겠다.  


스카이트리가 잘 보이는 긴시초 공원.
공원이라기엔 운동장 같은 느낌을 주지만 면적이 넓어서 참가자 수도 그만큼 많은 편이다.
꼬맹이들은 "장난감이 싸요! 싸요!" 하면서 장사에 열심이었다.
기치조지의 파르코 백화점 옥상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규모가 작은 만큼 예쁜 물건은 금방 다 팔려버리기에 일찌감치 가야 한다.
이게 바로 그 스팽글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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