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책을 좋아하지만 그것의 유익함이라든지, 인류 문화사적 가치라든지, 혹은 지적인 성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다른 매체에 비해 책이라는 물성이 우월한지도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분명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편이 더 친절하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시간과 노력 집약적이며,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파급력이 크지 않나. 점점 더 화면에 익숙해지는 세대의 흐름 속에서 너무 종이만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아집이 아닐까. 저물어 가는 종이 시대의 한가운데, 여전히 책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책이 가진 힘은 무섭다. 활자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펜으로 쓴 것은 무엇인가 확실한 것, 불변의 것,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 때문에 오히려 독서는 종종 어렵거나 지루한 것으로 생각된다.
독서는 결코 어렵거나 힘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지식을 추구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읽으면 된다.
이번 연재에서는 아주 가벼운 독서, 내가 여태까지 해온 독서의 다양한 면모를 다뤄보려고 한다. 독서는 하나의 취향일 뿐이며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지금 내가 고백하고자 하는 내가 책을 읽게 된 지극히 사적인 독서의 이유와 함께 말이다.
책은 어린 시절 하얗고 예쁘장한 남동생에 빼앗긴 집안 어른들의 관심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생 초반의 딸과 아들을 각각 두었던 우리 부모님은 전형적이고도 평범했다. 독서는 곧 지능이라고 여겼기에 책 읽는 내 모습을 무척 좋아했던 것이다. 황희 정승이나 율곡 이이의 위인전을 보면 그렇게나 다독가였다는 표현이 나오곤 했는데, 어디서 그런 고정관념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우리 집 사람들은 독서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내가 책을 집어 들면 온 집안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리라든지, 두부를 사 오라는 자질구레한 심부름과 집안일에서 흔쾌히 면제시켜줬다. 책을 많이 읽으면 서울대를 간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모든 책이 만물의 지식이라는 생각은, 사실 책의 일부분만 아는 사람들이 종종 범하는 착각이라는 걸 말이다. 책을 신성화하는 것, 절대화하는 것,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부모님의 사각지대에서 순전히 흥미 위주의 서사만 읽어댔고 심지어 그들의 기대를 이용해 텔레비전을 마음대로 볼 수 없는(부모님이 텔레비전 시청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하셨다) 억울함과 분통함 대신을 독서로 해소하곤 했다.
내가 본 책 속의 세상은 영화 속 그 어떤 서사보다 흥미진진했다. 얇은 한 장의 겉표지만 넘기면 그 속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온갖 금기의 이야기가 있었다. 살인, 강도, 금지된 사랑. 어떠한 발칙한 상상도 허용되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얇은 종이 한 장을 들추면 펼쳐졌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부모님의 관심과 칭찬을 받기 위해 독서를 하였다면 고등학생이 된 나의 독서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에서 주인공 남녀가 학창 시절, 도서부의 일원으로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이 나온다. 가장 유명한 장면이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흩날리는 커튼 뒤에서 남자 주인공 후지 이즈키(카시와바라 타카시 분)가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데 어머나 세상에, 나는 그 장면에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도서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 그의 모습. 나는 도서부가 그런 선배들 천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나도 학교 도서관에서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으리라! 천방지축의 중학교 생활은 청산하고 차분하고 이지적이고 성숙한 신비로운 여고생의 아우라를 뿜어내리라.’
라고 다짐했지만 현실은 아침마다 반곱슬의 머리와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의 도서부의 위상은 열악할 뿐이었다. 멋진 후지 이즈키 선배? 그런 게 있을 리가. 도서부 선배들이라고는 팽글팽글 돌아가는 안경을 쓴, 마르고 여드름 더덕 한 까칠한 남자애들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동아리 1 지망으로 도서부를 면접 보러 가는 신입생은 없었다. 덩달아 나도 도서부를 지원하고자 했던 마음은 한편에 접어두고 잘 나가는 선배들이 있는 영자신문부에 지원했다.
나의 독서의 원동력은 순전히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내 모습에 취해 책을 펴 들던 때를 생각하면 열 손가락이 모두 오글거리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보이느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책을 읽는 내 모습이 좋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나의 독서의 이유는 이렇게나 하찮다. 때로는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 때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순전히 지적 허세를 위해, 나는 읽었다. 물론 책은 날 서울대에 보내지 못했고, 고급스러운 취향의 우아한 지성인으로 만들지도 못했으며, 후지 이즈키 같은 멋진 남자와의 연애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하지만 종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질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으면 그 작은 물성이 주는 안정감에 편안함을 느꼈다. 책은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삶의 위태로운 순간들마다 얼마나 많은 책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성장할 수 있었던지.
행복한 서사는 내게 따스함이 무엇인지 알게 했고, 완결된 비극적인 서사는 받아들임의 의미를 일깨워줬다. 타인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책은 몇 번이고, 그리고 몇 번이나 인내를 가지고 보여주고 기다렸다.
물론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정말로 책이 영화나 텔레비전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지,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읽기 능력은 단순히 독해 능력 외에도 다양한 지적 기능들을 발달시키는지, 정말 유튜브로 지식을 접하는 다음 세대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지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책이 없었더라면 개인 하현주는 지금보다 더 못난 인간으로 살았을 거라는 것이다. 이 작은 물건에 빚진 것은 너무 큰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나의 독서의 이유를 쓰는 것뿐이다.
코로나가 길어지자 내가 알던 몇 군데의 독립서점이 문을 닫았다. 출판사에서는 줄어가는 독서 인구를 우려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책을 읽지 않는다면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위협적인 마케팅을 한다. 실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돈벌이가 사라져서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공격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처참한 방식으로.
책의 시대는 정말 끝이 났는가. 책에서 위로를 받는 나는 낭만적인 상념에 젖어 있는 나이브한 인간인가. 우리에게 팔리는 책이라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혹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책뿐이란 말인가. 그 어떤 질문에도 웃으며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흐름에 맞서 싸울 자신도, 이길 자신도 없다.
그러나 나는 계속 읽는다. 가방 속에 혹은 차의 뒷좌석에 좋아하는 책, 앞으로 읽을 책, 지금 읽고 있는 책, 어제 산 책, 샀는데 또 산 책을, 지금처럼 쟁여놓고 말이다.
나는 책이 가진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